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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사랑 -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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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머리에서 가슴까지 버스가 교차하며 앞을 가린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열렸을 때 분명 시후라고 생각했던 아이는 건너편에 없었다. 아무리 훑어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후……” 정희의 입에서 힘없이 흘러나온 그 소리는 아스팔트를 거칠게 밟고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타이어에 짓눌려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신호가 몇 번을 바뀌고도 정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혹여 차들에 가려진 저 편에 다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부질없는 희망을 하면서 오가는 사람들의 사이에 서서 혼자만이 그렇게 장승처럼 서 있었다. “이제 가야지?”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듯 건너편을 바라보는 김주호 선생의 옆모습이 보였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의 모습이 어쩐지 가라앉은 듯 보였다. 그가 언제부터 옆에 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신호가 바뀌어 다시 보행자 신호가 들어 올 때까지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생각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정체와 목적이 무엇인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만 지금 그가 자신에게 호의를 갖고 있고 정희의 예민한 감각상 그에게서 아무런 기도 느껴지지 않지만 또한 나쁜 기의 흔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신호가 바뀌자 그가 먼저 걷기 시작했다. 정희도 그의 뒤에서 길을 건넜다. 횡단보도를 다 지나갈 즈음에는 어느 사이엔가 그와 정희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그와 정희는 걸음을 멈췄다. “학교에서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그가 웃으며 손을 흔든 후 등을 보이고 걸어갔다. 그런 그를 보다 몸을 돌이키던 정희가 내딛던 걸음을 멈췄다. 잠깐의 생각 후에 정희가 돌아섰다. 빠른 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간 정희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선생님!” 정희를 내려다 보는 그의 눈이 빛처럼 반짝였다. “무섭지 않니?” 뜬금없는 듯한 그의 말. 그러나 그 말은 지금 정희의 마음을 나타내는 현주소와 같았다. “무서워요.” 그가 정희의 손을 잡아왔다. 그렇게 정희는 손을 그에게 맡긴 채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은 차이가 있지.” “그런가요? 그럼 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건가요?” “그거야 스스로 알고 있지 않을까?” “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어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로 이해가 되었는지도 아직 확신이 서지 않은 모양이군.” 사실이 그랬다. 그래서 더욱 그에게서 마음의 확신을 얻고 싶은지도 몰랐다. “와인 한잔 할까?” “와인… 이요?” 뜻밖의 그의 말이 정희를 당황케 했다. 교사가 학생에게 술을 권하다니.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들었다면 김선생을 어떤 눈초리로 쳐다 보았을까? “마음이 릴랙스해지는 데는 와인이 제격이지. 요즘 학생들은 대부분 술 하는 것 같던데. 못하니?” “먹어보긴 했지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너 답구나. 후후……” 자신답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자신이 그렇게 답답한 범생이로만 보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드시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어쩌면 약간의 반발이었는지도 모른다. 정희는 불쑥 뱉은 그 말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그래?” “네.” “그럼 그러자.” “어디로 가실 건데요?” “어디긴! 내가 사는 곳이지.” “네……” 가슴이 뛰고 있었다. 정희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시후의 빈자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커져가는 만큼 그 자리를 메울 누군가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를 쳐다봤다. 언제나 평온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오늘도 변함없이 평온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집에서 와인을 하자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자꾸만 되씹어 봤지만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려웠다. 다만 지금은 궁금한 많은 것들을 그를 통해 알고 싶고, 어쩐지 혼자이기 보다 편안한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원룸에는 침대 옆으로 길게 3인용 소파가 있고 그 앞에 타원형의 유리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소파를 보며 아마도 그는 때때로 침대가 아닌 그 소파에서 잠을 자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 앞 벽 쪽에는 장식장 위로 TV와 독특하게 생긴 앰프도 있었다. 더구나 이제는 구경하기조차 힘든 과거 전축이라 불렸던 턴테이블마저 놓여 있었다. 지난 번 왔을 때는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고, 그것들이 하나같이 독특한 그의 취향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음악을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CD와 LP판이 가득한 장식장 안을 들여다보며 정희가 말했다. “어려서부터 음악공부를 좀 했거든.” “음악을요? 성악?” “아니, 바이올린.” “아……” 신기한 듯 장식장 안을 살펴보던 정희가 주방 앞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와 이런 것도 있네요? 예전 저 어렸을 때 저희 집에도 몇 개 있긴 했었는데.” “예전 LP라고 하던 거지. 뭐 지금은 거의 골동품이지만.” “CD와 비슷한 거죠?” “그렇지. 거기 턴테이블에 올려 놓으면 돼. 지금도 동작은 잘 하거든.” “여기 이건 뭐에요? 전구 같은 것이 올라온 거요.” “그건 진공관이야. 진공관 앰프라고 하는 거지.” “아, 그렇구나. 들어본 적이 있어요. 무척 귀한 거라고 하던데……” “요즘 나오는 오디오보다는 소리가 더 부드럽고 풍부하지. 들어볼래?” “들어볼 수 있나요?” “원한다면.” 그의 부드러운 웃음이 정희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들려주신다면요.” 그가 접시에 무언가를 들고 와 테이블에 내려놨다. 핑크 빛으로 빛나는 그것은 훈제연어였다. 그리고 와인병과 두 개의 와인 잔이 놓였다. 잠시 후 바이올린 소리가 집안 구석구석을 메워나갔다. 부드럽고 슬픈 듯, 그러면서도 위 아래로 가차없이 흘러가는 그 소리는 온갖 기교의 집합체 같았다. “어떠니?” “좋은 걸요!” “다행이구나.” 그가 와인 잔의 바닥에서 겨우 조금 올라올 정도의 와인을 따라 정희 앞에 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는 1/4쯤 따라 놓고 향을 음미하고는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와인은 향으로 먼저 먹는다고들 하지. 별로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단다.” 그의 말에 정희도 잔을 들어 향을 음미했다. 알코올이 섞인 달콤한 향이 부드러운 듯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런 정희의 표정을 살피던 그가 잔을 내밀었다. 정희도 잔을 내밀었다. 두 개의 잔이 서로 다른 곳에서 달려와 마침내 마주친 파도처럼 서로에게 투명한 소리로 엉켰다가 여운을 남기고 떨어졌다. 그가 잔을 들어 살짝 잔을 흔들어 붉은 빛의 출렁임을 즐거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들이키는 것을 바라 봤다. 음악의 선율을 따라 움직이듯 그의 모습이 잔잔한 물결처럼 여유롭게 보였다. 정희도 키스하듯 입술을 적시는 와인을 입안으로 들였다. 코에서 느껴지는 향과 입안에 퍼지는 달콤함과 텁텁함, 그리고 씁쓸함이 묘한 부드러움으로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내리며 왠지 모르는 짜릿함이 온 몸을 관통해 지나갔다. 첫 모금 동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그가 부드럽게 웃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눈을 맞추자 그가 다시 잔을 내밀었다. 그의 잔에 정희 자신의 잔을 붙이려 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정희 손을 이끌었다. ‘아하!’ 흔히 말하는 러브샷의 제안이었다. 팔과 팔이 엉키고 서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제서야 정희는 왜 러브샷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로의 거리가 마음의 거리와 비례한다고들 하던데 러브샷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다가설 수밖에 없으니까. 잔에 남은 것을 모두 들이키고 나니 그와의 거리가 너무나 가깝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금씩 쿵쾅거리며 커지는 정희의 심장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팔을 풀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행동이 아쉽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에게 정희는 그저 어린 제자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침묵이 흐르려고 했다. 어색해지는 것이 싫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무슨 곡이에요?” “사라사태의 바이올린 독주곡, 작품번호 20번, Zigeunerweisen(지고이네르바이젠)” “네… 연주는 누가?” “들어봤을 거야. 장영주라고.” “아, 네! 알아요.” “후훗……” 반가운 듯 말하는 정희의 말에 그가 약간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정희도 그를 보고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마음이 여유로워지지?” “네. 그렇네요.” “다행이구나. 그럼 정희가 하고 싶어하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역시나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눈이라도 가진 모양이었다. 와인과 음악으로 조금은 느슨해진 마음으로 정희도 조금은 편안하게 말을 꺼냈다. “연아는 자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한 것 같아요.” “다행이구나.” “연아가 자신을 잘 지킬 수 있을까요?” “글쎄… 정희가 옆에서 봐주면 그렇지 않을까?” “전 아무 힘도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 기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너의 힘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연아는 그 때 당했겠지.” “그렇지만 정욱선배에게는 통하지 않았잖아요.” “그럴까?” 짧게나마 정욱이 자신을 범하려 할 때의 공포가 몰려왔다. 그 때 자신은 스스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가 주는 공포는 크기만 했다. “이제 말해주세요. 그 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자세히 하나도 빼놓지 않구요.” 그가 자신의 빈 잔에 와인을 채웠다. 그리고 정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 잔 더 할래?” “이야기 듣구요.” 그가 한모금 와인을 들이키곤 잔을 내려놓고 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내가 그 시간에 학교에 가게 된 것도 너의 능력과 관련이 있어.” 정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몸을 그를 향해 비스듬히 하고 그의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네가 느끼는 것을 나도 느낀 거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선생님과 제가 그렇게 교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럴까? 후훗……” 그의 웃음이 감춰진 비밀을 말하는 것 같았다. “횡단보도 앞에서 너와 내가 오토바이를 피하려는 중에 서로 몸이 닿았던 첫 만남에서 나는 너를 느꼈단다.” 그 때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자동차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 지나가던 오토바이를 정희는 미처 알지 못했다. 만약 그 때 습관처럼 신호만을 보고 발을 내디뎠다면 아마도 오토바이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땐 참 감사했어요.” “감사 인사는 그 때 이미 받았잖니.” “그래두요. 그런데 저를 느꼈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저도 모르게 볼이 달아올랐다. 약간의 와인에도 취기가 오르는 걸까? 정희는 그가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볼까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그는 손에 든 와인 잔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지. 그 영혼은 너무나 섬세하고 예민해서 누군가의 영혼과 가까이 있게 되면 그를 느끼게 된단다.” “구체적으로요. 무얼 느끼는데요?” “그 사람의 성격, 느끼고 있는 감각이나 감정, 때론 과거의 기억까지, 드물지만 때론 현재의 생각도 느끼게 되지. 물론 그 모든 것의 방향이 빛과 어둠 어느 쪽인지도 대체로 알 수 있고.” “방향… 이라뇨?”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니? 저마다 느껴지는 기의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어떤 것은 어둡고 어떤 것은 밝게 느껴지지 않던?” “음… 그러네요. 어떤 사람은 그 느낌이 참 밝아서 좋아요. 하지만 어떤 사람은 어둡게 느껴지고 그래서 두렵거나 무섭고… 싫기도 하구요.” “예를 들어서 설명해볼래? 실제로 누구에게서 그런 것을 느꼈는지. 학교내에서로 국한해서.” 정희가 생각 속에 빠졌다. 초점 없는 눈으로 생각 속에서 한참을 헤매던 그녀가 한 순간 터널을 빠져 나오듯 생각 속에서 빠져 나오며 눈에 다시 생기를 담아냈다. “학교에서 느낀 밝은 기의 사람은… 3학년 유진 언니가 그랬어요. 이유진!” “어떻게 느껴지던?” “그 언니는 참 말이 없어요.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하죠. 성적도 좋기는 한데 이상하게 한 번도 전교 1등은 한 적이 없어요. 늘 2,3등이죠. 그래서 크게 주목 받지는 못하지만요. 작년에 학년별 대표들 몇 사람하고 학생회 간부 모임을 가진 적이 있어요. 거기서 그 언니가 눈에 들어왔어요. 음… 학교 생활관에서 방학 때 2박3일로 가진 모임이었는데 그 언니가 전체를 잘 조율하는 느낌이었어요. 토론하다가 보면 조금 격해질 때도 있고, 생활하면서 부딪히는 면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 언니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문제를 해결하더라구요. 그래서 참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 때 이후로 그 언니를 가끔 학교에서 마주치면 편안한 느낌이고 마치 몸에서 빛이 나오는 느낌이어서 좋았어요.” “잘 봤구나. 그 아이가 참 맑고 밝은 영혼을 가졌지.” “선생님도 아세요?” 대답 대신 그가 웃음을 보였다. “또 다른 사람은?” “음… 그 언니 말고는 그렇게 눈에 들어올 정도로 밝은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그럼 그 반대의 사람은?” 정희의 얼굴이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어두워졌다. “기태가 그렇죠. 그 애는 1학년 때부터 절 쫓아다녔는데 생긴 것도 잘 생긴 편이고 공부도 잘 하고 하는데도 이상하게 무언가 삐뚤어진 느낌이 들어요. 처음부터 어두웠다기 보다 점차 어두워져 가고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가장 불편하게 어두운 건 두 사람이에요. 체육담당이신 최성렬선생님하고 3학년 조정욱 선배요. 그 두 사람은 처음부터 어둠 저편의 사람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랬구나. 그리고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니?” “같은 반 효진이요. 그 애는… 다른 사람을 어두운 곳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이상하게 그 애와 친하게 지내는 아이는 점차 이상하게 변하더라구요. 그 애를 좋아하던 주진혁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2학년 올라오고 나서 점차 몸도 아프고 하더니 며칠 전부터 병원에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처음엔 무척 건강하고 성격도 밝은 아이였거든요. 작년에 효진이랑 사귄다고 하고부턴 애가 변했어요. 잘 웃지도 않고, 짜증이나 신경질도 자주 내고. 그래서 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도 사이가 멀어진 것 같더군요.” “음……” “제가 지금 생각나는 밝은 기와 어두운 기의 사람들은 대충 그래요.” “정확하게 봤다. 그 기란 것은 그들이 어디에 속해있는가와 관련이 있지. 그리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능력과도 관련이 있고.” “능력… 이라구요?” “그렇단다. 저마다 독특한 능력들이 있지. 그건 마치 동물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보호색이나 날카로운 이빨, 빠른 발 등을 갖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 “그럼 저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는 건가요?” “당연하지.” “전 그런 걸 느끼지 못했는데……” “아닐 걸? 넌 영혼을 보지 않니? 그래서 백시후의 영혼과 1년을 같이 지내기도 했고 말야.” 정희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시후를… 아세요?” 그가 다시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 아이를 무척 많이 좋아했다는 것도 알고 있단다. 물론 그 아이도 너를 많이 좋아했지. 그렇지만 영의 존재가 살아있는 사람과 그렇게 같이 오래도록 지내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지.” “무슨… 뜻인가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아이는 너로 인해서 본인이 가야 할 길을 계속 미루었단다. 그런데 영혼이 갈 길을 가지 않고 세상에 있으면 점차 가야 할 길을 잃고 헤매게 되지. 그러다 어느 순간 세상에 버려지게 된단다. 그럼 그 영혼은 평안을 얻지 못하고 또 다른 기회도 갖지 못하게 되지.” “또 다른 기회요?” “후훗…… 지금 그걸 이야기해주기는 네가 아직 영적인 부분에 있어 어리단다.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도 너에게 좋을 것이 없어. 시간이란 것이 뒤로 가지 않고 늘 앞을 향해 일정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영혼의 길도 그렇단다. 저마다의 영혼들이 가야 할 길이 있고 그 길을 제때에 찾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지.” 그의 이야기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심오한 철학을 강연하는 것 같았다. 가슴은 반응하는데 머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순간 순간 발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이 다르다고 한 모양이구나……” “그건 그렇구요, 제가 갖고 있는 능력은 어떤 건가요?” 정희의 질문에 그는 한동안 그저 웃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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