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 -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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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람실 문을 열자 훅 후덥지근한 열기가 밀려왔다. 숨이 턱 막힌다. 당장 뒤돌아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발걸음은 터덜터덜 내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나도 그 열기에 휩싸여 공부에 열중했다.
“시험 잘 봤냐?”
“소설 썼다.”
앞에 가는 학생들이 저희끼리 허탈하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학점 말아먹겠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대부분 학생은 목차는 외우고 들어간다. 그럼 일단 뼈대는 세울 수 있는데 문제는 살이 없으니 주저리주저리 헛소리만 늘어놓는 거다.
쓰면서도 ‘아, 이거 내가 헛소리하고 있구나.’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장수라도 채우면 노력이 가상해서 점수 주시겠지. 백지를 낼 수는 없으니 헛소리 쓰고 나온 후 자괴감이 물밀듯 밀려온다.
그런 상황을 주로 소설 쓴다고 표현하고는 했다.
정지헌에게 도움을 받기 전, 학원 모의고사에서 나도 몇 번 불의타4)를 맞고 법전을 베껴 가며 소설 쓴 적이 있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천천히 손을 씻었다. 거울 속에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있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차가운 손으로 볼을 만졌다.
교수는 B급에서 케이스 문제를 내고 A급에서 단문을 냈다. 케이스로 낼 만큼 쟁점이 많은 단원이 아니라서 모두 당황했다. B급에서 케이스라니. 반칙 아닌가? 그것도 초면인 판례였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학생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곧이어 촤라락, 하고 침묵 속에 법전 넘기는 소리만 무섭게 울렸다. 법전은 말하자면, 총이었다. 전쟁에서 유일하게 지급된 무기. 최대한 그것에 의지해 살아남아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법전을 앞뒤로 샅샅이 뒤적이고, 혹시라도 어디서 읽어 본 판례일까 기억을 더듬고, 각자 나름대로 쟁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헛다리 짚을 확률이 높다.
시험지 받자마자 목차 작성은 불문율이다. 그 시간에 쟁점을 찾기 위해 법전을 뒤적이며 보낸다는 건, 시작부터 망할 조짐이다. 법전을 뒤적이는 학생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아서 하얗게 얼굴이 굳어 있다.
나는 시험지를 본 순간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모두 정지헌이 준 서브 노트에 있던 내용이었다. 심지어 가장 점수가 큰 케이스는 정지헌이 A급으로 찍어 준 판례였다.
시험지 여백에 미친 듯이 목차를 작성하고, 반흥분 상태로 90분 동안 정신없이 본문을 써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며 A 학점을 예감했다. 오랜만에 느껴 본 희열감이었다.
조교에게 시험지를 조심스레 제출하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로 팔이 떨렸다. 담배 생각이 절실했다.
정지헌 불러서 담배나 피울까. 사실 담배는 핑계일 뿐, 시험장을 나오면서 가장 먼저 정지헌 생각이 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번 시험은 정지헌 공이 컸다.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 맞은 초등학생처럼 시험지 들고 정지헌에게 달려가 유치하게 자랑하고 싶었다. 정작 학창 시절 때는 숱하게 100점 맞아도 부모님께 자랑한 적 한 번 없으면서.
내가 정지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이렇게 컸던가 스스로 놀라웠다.
단과대 건물을 나오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벚꽃이 흩날리는 벤치에 앉아서 먼저 시험장을 떠난 친구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난 날이라 모두 얼굴이 홀가분했다.
“선배, 유럽 여행은 어땠어요?”
정지헌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밝은 햇빛 아래서 지헌의 결 좋은 까만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응, 좋았어. 일정이 짧아서 다 못 둘러본 게 아쉬워. 다음엔 더 길게 가 보려고.”
지헌은 나직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희! 시험 끝났어? 이리 와!”
나를 발견하고 승아 언니가 손짓했다. 지헌의 앞에 앉은 다은도 알은체를 했다. 그쪽으로 건너가려고 발걸음을 뗐을 때였다.
단과대 건물 앞으로 오은성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
마구 손을 흔들던 승아 언니가 어색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사람들도 급격히 입을 다물고 정지헌 눈치를 살폈다.
지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은성을 응시했다. 오은성은 정지헌을 의식하며 천천히 테이블을 지나쳤다.
나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감정의 찌꺼기가 남은 얼굴. 헤어지긴 했는데 말끔하게 끝나지는 못한, 둘만의 사정이 있어 보였다. 어쩌면 지금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육체적인 쾌락만 즐긴 것뿐, 정지헌이 어디서 또 즐기고 다니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계단을 내려가 테이블 근처에 섰다. 정지헌은 또각또각 사라지는 오은성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뒤늦게 내 존재를 눈치채고 고개를 바로 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시험 잘 봤어?”
다은이 가볍게 웃으며 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에 놓으며 적당히 둘러댔다.
“그냥, 대충.”
“교수님 진짜 그걸 케이스로 낼 줄 몰랐어. 문제 좀 지저분하지 않아?”
“응, 좀 그렇더라.”
B급을 억지로 케이스로 내다 보니 문제가 조잡하긴 했다.
“그거 몇 년 전 판례라면서? 난 몰랐어. 완전 헛소리 쓰다 나왔네.”
다은이 말에 한쪽에서 대화하던 아이들이 흥분해서 말을 쏟아 냈다.
“무슨 하급심 판례를 학교 시험으로 내. 그런 걸 누가 찾아본다고.”
“야, 근데 기판력에서 상계 항변도 쓰는 거 맞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시간 없어서 그냥 나왔는데 찝찝하네. 쓸 걸 그랬나, 괜히 썼다가 마이너스 받을까 봐.”
“몰라. 난 그냥 법전 베껴 썼어. 쟁점이 뭔지도 모르겠더라.”
“나도 쟁점 다 못 썼어.”
“쟁점 많이 써도 소용없어. 민소 216조? 그거 언급 안 한 학생들 다 C 준대.”
“와, 말도 안 돼. 지헌아, 저 말 진짜야? 그 교수님 작년에도 저러셨어?”
아이들 시선이 모두 지헌을 향했다. 지헌은 애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법조문 누락했다고 무조건 C는 아니었고, 그래도 쟁점 많이 쓰면 B까지는 주셨던 것 같아.”
아…. 아이들이 모두 탄식했다. 나는 눈을 내리뜨고 무릎 위 가지런히 올린 손만 응시했다.
시험 전 정지헌에게 서브 노트를 받은 내 행동이 반칙처럼 느껴졌다. 지헌은 무슨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 참, 미희는 지헌이 잘 모르지?”
이어지는 말에 번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은이 정지헌을 가리켰다.
“승아 언니 사촌이래. 미희는 전과해서 잘 모를걸?”
“아니, 알아.”
커피를 집으려던 지헌이 시선을 돌려 의외라는 듯 나를 보았다. 뭐라고 대답하나 보자, 흥미로운 눈빛이었다.
“알아?”
다은이 묻는 말에 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수업 시간에 본 적 있어. 그 행정법 첫 수업 때 있잖아.”
“맞아, 그때 대박이긴 했지.”
다들 수긍했다. 나는 정지헌을 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
“응, 안녕.”
지헌이 피식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그러면서 턱을 괴고 내게 물었다.
“다들 어려웠다던데, 시험 잘 봤어?”
“응. 덕분에.”
“덕분에?”
“엊그제 본 채권법 말이야. 선배들이 준 족보 덕분에 잘 봤어. 특히 네 서브가 도움되더라고.”
“지헌이 서브 노트야 뭐 훌륭하지.”
승아 언니가 끼어들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 맞다. 미희 너 내일 시간 괜찮아?”
“왜요?”
“다은이 소개팅시켜 주려고 했는데 어머니 생신이래. 미희, 넌 시간 괜찮지?”
“시험 끝나서 여유 있긴 한데….”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승아 언니가 반색했다.
“잘됐다! 잠깐 점심때 보면 돼. 네가 대신 좀 나가 줘. 얘가 눈이 높아서 아무나 소개하기 좀 곤란했거든.”
“근데 난 소개팅은 별… 아!”
차가운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깍! 미희, 괜찮니?”
“왜, 누구 음료수 쏟았어?”
주위 친구들이 놀라서 웅성거렸다. 쏟아진 음료수 캔이 또르르 테이블 위를 굴러 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놀라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미안.”
정지헌이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쏴.
쏟아지는 물줄기에 셔츠를 최대한 잡아당겨 물에 적셔 비볐다. 앞자락에 쏟아진 음료수를 보니 ‘실수였어’ 사과하며 웃던 정지헌이 떠올랐다.
미안하면 웃지나 말든지. 차라리 싸가지 없는 무표정이 낫다. 웃으면 역시 재수 없어.
타월을 툭툭 셔츠에 두드려 물기를 제거했다. 드라이어를 켜고 최대한 셔츠를 말리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열렸다. 문가에 지헌이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야.”
묻는 말에도 지헌은 대답 없이 손만 뒤로 뻗어 문을 닫았다. 달칵,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아서 도망 나왔어.”
지헌은 어깨를 으쓱이며 벽에 기대섰다. 그러곤 담배를 만지작거리면서 화장실 창으로 벤치에 앉은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벤치 옆에는 경영학과 오은성이 다은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헌은 오은성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 어떤 시선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귀찮긴. 마주치면 곤란하니까 피한 거면서.
나는 피식 웃고 물에 젖은 손을 지헌의 셔츠에 마구 문질렀다. 지헌은 페인팅한 것처럼 크게 손자국이 난 가슴팍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내 티셔츠에는 지헌의 손자국보다 훨씬 큰 물 자국이 얼룩덜룩 남아 있었다. 물에 젖은 옷은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서 하얀 속옷을 선명히 드러냈다.
“볼만한데.”
내 꼴을 죽 훑어 내리며 지헌이 웃었다.
“덕분에. 고맙다.”
나도 씨익 웃으며 보란 듯이 손을 앞뒤로 지헌의 티셔츠에 문질렀다. 빳빳한 셔츠는 엉망으로 구겨졌다.
지헌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웃더니 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나도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서로의 혀는 농밀하게 엉겨 붙었다.
“으음.”
지헌은 낮게 신음하며 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지헌의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지헌의 손목을 잡으며 밀어냈다.
“그만해.”
그래도 지헌은 고개를 비틀며 다가왔다. 나는 팔꿈치로 좀 더 강하게 지헌을 밀어냈다.
“나 과외 가야 해.”
단호한 말에 지헌은 아쉬운 표정으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데려다줄게.”
지헌의 뒤에 있는 창으로 벤치 옆에 서 있는 오은성이 보였다. 오은성은 아쉬운 얼굴로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나는 지헌을 밀어내려던 손으로 가슴부터 아래로 죽 손을 내리그었다. 다리 사이에서 부풀어 오른 성기가 만져졌다.
“…잠깐이라면 괜찮아.”
오은성한테 시선을 떼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지헌이 의아한 얼굴로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재빨리 지헌의 목덜미를 잡고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헌은 낮게 신음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지헌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스스럼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내 손이 닿자 지헌의 성기는 한층 더 부풀어 올랐다. 나는 예민한 살덩이를 거침없이 손에 쥐고 훑어 내렸다.
지헌은 눈을 내리뜨고 낮게 숨을 토해 냈다. 얼굴만 보면 평상시와 똑같이 차분하다. 오히려 금욕적인 느낌마저 든다. 간간이 얼굴을 찌푸리고 억누른 숨을 내쉴 때 얘가 흥분하긴 했구나, 싶었다.
갈라진 끝부분을 손으로 나긋이 문지르자 못 참겠다는 듯이 내 손을 겹쳐 잡았다. 그러곤 강한 압력으로 성기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더니 맥박 치는 느낌과 함께 울컥 파정했다.
“후으, 후으.”
지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 토해 내고도 반쯤 일어선 성기를 내 손바닥에 대고 진득하게 문질렀다. 하얀 정액들이 손가락을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그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다.
내 손이 대단한 것인지, 고작 손 하나 갖고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정지헌이 대단한 것인지. 하여간 적당히 했으면 좋겠는데, 풀 같은 것이 연이어 쭉쭉 뿜어져 나왔다. 양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얘는 진짜 혼자 자위도 안 하나.
손가락 사이로 끈끈하게 흘러내리는 정액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는데 지헌이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
“먹어 볼래?”
“…….”
커피라도 한잔 권하듯 태연스러운 어조였다.
나는 가차 없이 돌아서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어 쏟아지는 물줄기에 손을 밀어 넣었다. 백탁액이 씻겨 내려가는 것을 지헌은 못내 아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화장실 창문 너머 멀리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기들이 보였다. 그 사이에서 매너 있는 척 정중하게 대화하던 지헌이 떠올랐다.
저렇게 단정하고 금욕적이게 생긴 놈한테 이런 변태 같은 면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르겠지.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남자라면 질색을 해 놓고 뒤에서 맹랑하게 이런 짓 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수도꼭지를 잠그자 지헌이 자연스럽게 페이퍼 타월을 뜯어 건네주었다.
“음, 근데 우리 언제까지 비밀로 해야 해?”
나는 타월에 손을 닦으며 무심히 되물었다.
“뭘.”
“이제 사귈 때도 됐잖아.”
하던 행동을 멈추고 지헌을 향해 돌아섰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응? 하고 다시 물었다.
“누가? 우리가?”
“나랑 이런 짓 하는데 안 사귄다고?”
지헌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말끝에 불편한 심기가 드러났다. 내 트집과 구박도 늘 여유롭게 넘기던 정지헌이기에, 드물게 보이는 날카로운 모습이 어색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난 우리가 서로 비슷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헌이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했다.
“난 보수적이라 같이 자면 사귀는 거야.”
“…….”
보수적…. 퍽이나. 뭐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저기, 미안한데 우리가 같이 잤어?”
“삽입보다 더한 짓을 했지.”
애매한 얼굴로 웃는 내게 지헌이 이죽거렸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다.”
“그럼 사귀는 거 맞지?”
“글쎄. 너도 알다시피 시험도 얼마 안 남았고 우리한테는 지금이 중요한 시기잖아.”
곤란한 얼굴로 좋게 다독였다.
“우리는 목표가 같잖아. 뭐가 문제야. 계속 이렇게 네 옆에서 너 도와주고 싶어. 내가 잘해 줄게. 넌 앞으로도 나만 따라오면 돼.”
지헌이 내 볼을 감싸고 제법 진실한 눈으로 말했다. 그 눈빛의 떨림을 보고 있자면 지헌의 말을 믿고 싶었다. 지헌에게 기대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싫었다.
“…….”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지헌의 손을 밀어내고 웃었다.
“여기서 그런 말 들으니까 참 믿음직스럽다.”
지헌은 농담으로 빠져나가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봐주겠다는 듯 마지못한 얼굴로 나를 놓아주었다.
우리는 본관 뒤에 주차된 그의 차로 이동했다.
“피곤하면 좀 자 둬.”
지헌이 내비게이션에 주소 찍는 것을 보고 나는 좌석에 기대었다. 시험 후 남은 흥분이 모두 사라져 그제야 피곤이 몰려왔다. 이성이 돌아오고 조금 자괴감도 든다. 참 이것도 병이지 싶다.
정신없이 나가는 진도를 허겁지겁 소화시키고 나면 매주 강도 높은 케이스 시험이 돌아온다. 그런 생활을 몇 달간 지속하면 중압감과 초조함으로 신경이 바늘 끝처럼 날카로웠다.
그럴 때 지헌과 거칠고 더럽게 어울리면 그런 감정들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다. 나도 가끔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변태 같은 놈, 재수 없는 놈이라고 욕하면서 내내 정지헌과 어울리는 이유였다. 시험 끝날 때까지는 지헌의 자료가 아쉽기도 하고.
나는 마지노선을 2차 시험 때까지로 잡았다. 시험만 끝나면 저런 변태 같은 놈하고는 상종도 안 할 테다. 오래 두고 볼 놈은 아니었다.
“피곤할 텐데 좀 자.”
지헌이 내 쪽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나는 운전하는 지헌을 눈에 담았다. 능숙하게 운전하는 모습이 꽤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까는 졸렸는데 지금은 괜찮아.”
차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한참을 올라갔다. 어느 순간 넓고 구불구불한 길옆으로 대형 주택들이 보였다. 지헌이 차로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버스를 갈아타고 와서 저 길을 걸어 올라가느라 고생깨나 했겠다.
“차가 있으니까 편하긴 하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말에 지헌이 가볍게 웃었다.
“앞으로도 말만 해. 태워다 줄게.”
“이렇게 편하게 다니다가 걸어 다니면 불편할 것 같아.”
“계속 타고 다니면 되지. 뭐가 문제야.”
“…….”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잔잔한 흔들거림에 몸을 맡겼다. 일하지 않아도 되고,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그냥 이렇게 끝도 없이 가고 싶었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데 차는 어느 대형 주택 앞에 멈추어 섰다. 고개를 기울인 지헌이 주택을 확인하며 말했다.
“끝나고 전화해.”
“왜?”
“기다릴게.”
“됐어. 그냥 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 치며 차 문을 여는데 지헌이 내 팔을 잡았다.
“혼자 집에 어떻게 간다고 그래. 기다릴게. 끝나기 전에 전화해.”
유치원생 대하듯 하는 모습이 우습다. 너 없을 때도 잘만 살았다. 이거저거 다 말하자니 귀찮았다. 과외 시간도 다가오고, 차라리 정지헌 스케줄을 지적했다.
“너 수업 있잖아.”
“수업 끝나고 올게.”
“뭐 하러 그래. 귀찮게.”
“끝나고 전화해.”
“…….”
그러든지 말든지. 길바닥에 버리는 게 네 시간이지 내 시간이냐. 똑똑한 애가 왜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사는지 모르겠다.
시큰둥한 반응에 지헌이 끝까지 밀어붙였다.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차에서 내려 벨을 누르는 모습을 지헌은 끝까지 지켜보았다.
너른 정원을 지나 저택으로 들어가자 일하시는 분이 응대했다.
“사모님 잠깐 통화 중이세요. 영우 군 방은 2층으로 올라가서 첫 번째 방이에요.”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가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성인이라 잠깐 멈칫했다. 얼굴이 내 친구라고 해도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하긴 나이로 치면 대학교 1학년이니 당연한 건가.
“와, 개 이뻐.”
멍하니 나를 보던 남자가 툭 내뱉었다. 입을 여니까 어린 티는 난다. 나는 한심한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체격만 크다 뿐이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얼굴이 풋풋했다.
“일단 오늘은 간단히 테스트 좀 하자.”
책상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프린트물을 꺼내었다. 영우는 ‘에이, 오자마자 공부야.’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면서도 펜을 주워 들고 착실히 풀었다.
그래도 애는 착하긴 한 것 같다. 컨트롤하기 어렵진 않겠어. 다행이다.
영우는 휙휙 펜을 돌리는 여유까지 부리며 거침없이 문제를 풀었다. 요새는 잘사는 애들이 공부도 잘한다.
자연스럽게 생각은 정지헌에게로 이어졌다.
“이거는 단권화가 아니라 그냥 다 오려 붙인 거 같은데.”
“1회독 하고 벌써 케이스 들어가? 자신감이 대단하네. 난 3회독 해도 어렵던데.”
“과 수석이 별건가. 수업만 잘 들으면 쉬워.”
“이게 이해가 안 돼? 왜 이게 이해가 안 되지.”
“글쎄. 답안지가 교수님 눈에 띈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냐. 그만큼 훌륭한 답안지가 아니면 오히려 단점이 두드러지는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내가 볼 때 너는 그냥 중간이나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답안지로 너무 튀려고 애쓰지 마.”
잘난 놈인 건 사실인데 자꾸 은근슬쩍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한번은 작정하고 일본 쪽 어려운 케이스를 가져갔다. 잘난 척하더니 어디 얼마나 잘 푸나 보자, 못 풀기만 해 봐라, 단단히 별렀는데 그 케이스조차 수월하게 풀어 버리고.
“와, 너 어려운 거 푸는구나. 너 이러다 동차 합격하겠다. 재학 중 수석 타이틀까지 따겠는데?”
웃으며 농담하는 지헌에게 할 말을 잃었다.
그 뒤로 그 특유의 완벽함에 기가 질려 실력 테스트 하겠다는 생각조차 사그라들었다. 참 재수 없는데 너무 잘나서 인정할 수밖에 없고, 또 묘한 반발심이 든다. 나는 죽도록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을 너무 쉽게 해내는 사람을 보면서 드는 거부감과 자괴감이다.
처음에는 내 열등감 때문인가 헷갈렸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확실히 정지헌은 칭찬도 기분 나쁘게 하고 스터디할 때도 사람 자존심을 살살 긁었다.
“다 풀었어요.”
영우가 자신 있게 테스트지를 내밀었다.
“응, 이리 줘.”
정지헌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갈무리하고 테스트지를 받았다. 꽤 뿌듯해 뵈는 얼굴이 문제가 쉬웠나 보다. 나름대로 상위권 수준에 맞게 가져왔는데 난이도를 좀 올려야겠다고 긴장하며 색연필을 들었다.
“…….”
그러나 채점이 끝난 후 나는 심란한 눈으로 영우를 돌아보았다.
“너 일부러 이런 거니?”
“네? 뭐가요?”
“나한테 반항하려고?”
진지하게 묻는 말에 영우는 깜짝 놀라서 양손을 내저었다.
“아닌데요? 저 너무 열심히 풀어서 지금 머리 쥐 날 거 같은데요? 예쁜 선생님 오셔서 잘 보이고 싶어서 제 능력보다 더 무리했어요.”
억울하다는 얼굴이 진심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이스트가 꿈이라고 들었는데.”
“꿈은 꿀 수 있죠.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내 꿈이 아니라 우리 엄마 꿈이에요.”
“…….”
헤헤, 하고 웃는 얼굴이 참 해맑다. 나는 할 말을 잃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수학 잘 못해요.”
안 좋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녀석이 변명하듯이 말한다. 수학? 나는 영우를 돌아보며 다정히 웃었다.
“영우야. 너는 수학을 못하는 게 아니야.”
“그래요?”
좋아서 웃으려던 영우는 이어지는 내 말에 시무룩해했다.
“수학이라는 단어도 너한테는 과분해. 넌 그냥 산수를 못하는 거야. 초등학생들이 하는 덧셈 뺄셈을 못하는 거라고.”
“얼굴은 완전 내 이상형인데 말은 진짜 못되게 하신다.”
“책이나 펴.”
그랬더니 툴툴거리며 수능용 자습서를 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도 전부 상위권 자습서들이다. 테스트지 구석에 풀어 놓은 걸 보면 분수끼리 덧셈 나눗셈도 제대로 못 하면서 기가 막힌다.
“저거 다 네가 산 거야?”
영우가 책장을 휘둘러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엄마가요. 근데 저거 그냥 장식용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일단 오늘은 앞 단원 조금만 나가자. 다음에 네 수준에 맞는 교재를 가져오도록 할게.”
“내 수준에 맞는 교재가 뭔데요?”
“사칙 연산 학습지 알지?”
“그거 초등학생 애들이 푸는 거 아니에요?”
“응. 맞아.”
“에이,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그냥 시간이나 때우다 가세요. 다른 쌤들도 다 그랬어요.”
“자, 1단원 기본 문제부터 볼까? 다항식….”
“어! 선생님 연예인 누구 닮았는지 이제 생각났어요.”
“…….”
그 뒤로 수업 시간 내내 틈만 나면 딴소리로 방해했다. 아예 공부할 생각이 없고 기초 과정에 구멍 난 부분이 너무 많아 견적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걸 계속해 말아, 회의감에 휩싸인 내 고민은 단시간에 끝이 났다. 현관 입구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두툼한 하얀 봉투를 들고 기다리고 계셨다.
“사모님이 외출하시면서 전해 주라고 하셨어요.”
“…….”
눈앞에 내밀어지는 봉투는 너무 큰 유혹이었다. 결국, 집을 나오는 내 손에는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저택에서 나오자 담벼락에 주차된 정지헌의 차가 보였다. 수업을 갔다 온 건지 아예 안 간 건지 모르겠다.
가끔 내가 이해 못 할 부분에서 지헌은 강경하게 나왔다. 나한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어서 대부분 마음대로 하게 두는 편이었다.
그렇게 해서 네가 행복하다면 마음대로 해라.
이번 일 역시 입씨름하기 싫어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다.
“나오기 전에 전화하라고 했잖아.”
“잔소리 그만하고 출발해.”
잔소리를 한마디로 일축하고 좌석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능성 없는 아이는 맡지 않는다는 과외 원칙을 깨고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아 와서 마음이 불편했다.
“왜, 무슨 일 있어?”
“과외하는 애 때문에.”
“말을 안 들어?”
“아니. 애는 착한데 실력이 바닥이야.”
“그런 애들 많지. 그냥 적당히 시간이나 때워. 뭘 고민해.”
지헌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동안 내가 맡은 학생들은 상위권부터 하위권까지 실력이 다양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다들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이란 점이었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학생을 맡는 건 피차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재수생인 아이가 간단한 나눗셈조차 버벅대더라, 초등학생보다도 수학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지헌한테 영우 상태를 설명했다.
지헌은 운전하면서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가끔 자신이 과외받았던 경험담도 말해 주고 맞장구쳐 주기도 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상황이 어이없어서 스스로 웃음이 나고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허름한 골목 입구에서 지헌의 차가 서행하다가 멈추었다. 동네는 재개발 문제로 주변이 어수선했다.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린 지헌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부수다 만 건물이며 빨간 플래카드를 훑어보았다.
나는 지헌에게 구질구질한 내 환경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였다. 거기에는 네가 이래도 나를 계속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오기 어린 마음도 있었다.
다은이나 승아 언니에게는 애써 감추는 것들을 왜 지헌에게 보이는 건 아무렇지 않은 걸까.
나는 그 차이를 좀 더 잘 보이고 싶은 상대, 앞으로도 계속 볼 인연과 아닌 것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지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고, 앞으로 계속 이어 나갈 인연도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정지헌이 뒷좌석에서 커다란 쇼핑백을 꺼내었다.
“이거 뭐야?”
“노트북 고장 나서 리포트 쓸 때 고생했잖아. 이걸로 하라고.”
“…….”
가까이 다가온 지헌이 내 손에 쇼핑백을 쥐여 주고 턱을 잡아 올렸다. 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지헌을 마주했다.
“오래 안 기다려. 네가 할 수 있는 답변도 하나야. 삽입보다 더한 짓을 해 놓고 같이 안 잤다니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잖아. 안 그래?”
“…….”
“들어가. 오늘까지 리포트 써야 한다며.”
지헌은 뚜벅뚜벅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곧 조용한 골목길에 자동차 떠나는 소리가 울렸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 마음이 무겁다. 참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왜 사서 고생하는 걸까. 인생이 너무 심심해서 자극이 필요한가.
어디 가면 뒤처지는 거 없이 멀쩡한 놈이 뭐가 아쉽다고 나한테 들러붙어 구박받고 있는지 생각하면 짠하고, 그러면서도 나만 나쁜 사람 만드는 것 같아 곱빼기로 짜증 나고.
정지헌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원래 같이 고생하다 보면 끈끈한 정이 생기는 걸까. 학원을 같이 다니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 후회된다.
그렇다고 이대로 끝내는 것도 찜찜하고. 차라리 한 번 자는 게 어떨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섹스가 돌파구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키스가 거부감 들지 않으니 섹스도 괜찮겠지. 그런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같이 자도 되나? 이게 정상 맞나?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골목 안쪽에 들어서자 허름한 떡볶이집 간판이 보였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있는 가게는 떡볶이집이라는 간판에 어울리지 않게 술에 취해 흥청망청 떠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채 간판을 바꾸지 못해 떡볶이집 간판을 그대로 달고 있지만 해가 지면 동네 한량들이 어슬렁거리며 가게로 모여들어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는, 열린 문 사이로 벽에 걸린 여자 나체 사진이 보이는 그런 구질구질한 가게.
엄마의 두 번째 남편이 하는 가게였다.
아니, 식 안 올린 남자까지 따지면 다섯 번째던가? 엄마가 데려오는 남자는 갈수록 형편없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돈이라도 많은 놈을 만나든가. 만나는 놈들마다 저 모양이었다.
“남자가 싫은 거야, 아니면 내가 싫은 거야?”
정지헌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엄마가 데려오는 남자들은 다 형편없었지만, 그중에 세 번째 남자는 특히 최악이었다. 열일곱 살 비 오던 밤, 엄마와 맨발로 야반도주했던 일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남자와 엮여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데 남자를 싫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언니!”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애리가 후다닥 품으로 뛰어들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애리는 고개를 들어 배시시 웃었다.
“왜 나와 있어. 저녁 먹었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묻자, ‘으응’ 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손을 꼭 붙들었다.
“언니랑 같이 먹으려고.”
“언니 늦는다고 했잖아.”
애리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혼자 먹기 싫어.”
아직 어린데 혼자 먹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다는 걸 안다. 일곱 살에 외로움을 알아 버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 안쓰럽다.
“애리 오늘은 뭐 했어? 언니가 내 준 숙제 다 했어?”
애리는 쪼르르 마루 위에서 공책을 가져왔다. 이아리. 공책 한 면에 빽빽이 써진 이름. 내년이면 학교 들어갈 나이인데 아직 제 이름 석 자도 제대로 못 쓴다. 또래보다 체구도 작아서 모르는 사람은 다섯 살 정도로 짐작한다.
엄마와 새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애리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부모님이 장사를 나가고 나면 빽빽 우는 아이를 그냥 두고 보기만 했다. 공부에 열중하다가 뒤돌아보면 울다 지쳐 잠들어 있던 동생. 그때 기억은 지금도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 있다.
나는 이 아이가 예쁜 여자로 자라지 않기를 바란다. 독기 있거나 똑똑하지 않은, 무르고 예쁜 여자의 말로가 어떤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언니가 볶음밥 해 줄까?”
“와와, 볶음밥!”
손뼉 치고 좋아하는 애리 머리를 쓰다듬고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었다. 한쪽 다리를 세우고 쭈그려 앉은 엄마는 커다란 양푼에 밥을 비벼 먹고 있었다.
“저녁 안 먹었음 어여 숟가락 들고 오고.”
엄마가 내게 손짓했다.
“애리 가서 먹을래?”
애리를 쳐다보자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위해 주는 사람을 안다고 하던가. 애리는 엄마보다 내가 챙겨 주는 걸 더 좋아했다. 학부모 상담 때면 엄마 오지 말고 언니가 오라고 밤새도록 징징거려 몇 번 대신 가 준 적도 있었다.
한번은 길에서 애리 친구들과 만났는데 다들 나를 애리 엄마로 알고 인사했더랬다. 알고 보니 애리가 학교에 온 나를 보고 우리 엄마라고 거짓말한 것이었다. 생각하면 딱하기도 해서 나는 매번 애리의 거짓말을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됐어. 김치볶음밥 해서 애리랑 먹을게.”
머리를 대충 틀어 묶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밥통을 열어 밥을 확인하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는데 엄마가 뒤에서 슬그머니 물어 왔다.
“느이 아버지 아직도 술 드시던?”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김치를 쫑쫑 썰어 프라이팬에 넣었다. 엄마가 목청을 높였다.
“어? 올 때 느이 아버지 가게 안 지나왔어?”
탁, 주걱을 거칠게 내려놓고 돌아섰다.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매번 부득불 느이 아버지라고 갖다 붙이는 심보를 이해할 수가 없다.
“누가 아버지야.”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애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쟤가 또 왜 저러나, 엄마는 멍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억울한 얼굴로 하소연했다.
“언제까지 그럴 건데. 내가 나 좋자고 재혼했니?”
하, 나는 대차게 비웃었다.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아빠 만들어 주려고 재혼한 거잖아.”
“엄마가 원해서 한 거잖아. 엄마 좋자고 한 거지, 내 핑계 대지 마.”
“너 나한테 그러면 안 돼. 나 위자료도 안 받고 너 하나 데리고 나온 사람이야.”
휴지를 꺼낸 엄마는 눈물을 찍어 내며 18번인 신세 한탄을 시작할 기세였다.
이젠 씨알도 안 먹히는 방법을 왜 자꾸 고수하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엄마 곁에 있는 남자들이 싫었는데, 이제는 매번 당하면서도 남자 없이 못 사는 엄마가 징그러웠다.
나는 들은 척도 않고 밥을 볶다가 방을 향해 소리쳤다.
“이애리, 밥 먹으러 나와!”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말투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애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아기 때 그렇게 자주 울던 애리는 이제 울지 않는다. 웃지도 않는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알아 버린 모습이 잊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입맛이 쓰다.
“꼭꼭 씹어 먹어.”
불안하게 만든 게 미안해서 표정을 풀고 다정히 애리 머리를 쓰다듬자, 애리는 소처럼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며 숟가락 가득 밥을 퍼서 입에 욱여넣었다.
“이건 뭐야?”
방에서 나온 엄마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다. 안에서 화장품 세트가 줄줄이 나왔다. 정지헌이 노트북 말고 다른 것도 챙겨 넣은 모양이었다.
“이거 비싼 거 같은데?”
화장품 세트를 풀어 헤친 엄마는 로션 뚜껑을 열어 킁킁 냄새를 맡아 보고 손등에 발라 비벼 보고 난리였다. 내 통박에 시무룩해 있더니 금세 기운을 회복해서 신난 얼굴이었다.
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행 갔다 와서, 화이트 데이라서, 무슨 날마다 정지헌에게 받은 선물이 모으면 꽤 되었다. 내 소지품은 어느새 그의 선물로 채워졌다.
고만고만한 애들 틈에서 깔끔하고 잘생긴 정지헌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남자에게 무감하게 살아왔지만, 나도 보는 눈이 있고 잘생긴 사람을 보면 확실히 눈이 즐겁다.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체격을 볼 때면 저절로 잠자리가 연상되어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왜 사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걸까. 정지헌을 보는 내 마음은 왜 싸늘한지 모르겠다.
노트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버벅거리는 고물 노트북 들고 씨름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긴 하다. 쓰다 만 리포트를 펼쳐 놓고 복잡한 상념을 지우려 노력했다.
밥을 다 먹은 애리가 조용히 들어와 이불 위에 눕는 소리가 들렸다. 반듯이 누운 애리를 보고 불을 끄고 스탠드를 켰다.
곧 뒤에서 쌔근쌔근 잠에 곯아떨어진 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책상에 앉긴 했는데 밤이 깊도록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목차를 복사해 결론에 우려먹어도 되긴 하지만 좀 더 독창적인 결론을 맺고 싶었다.
정지헌이라면 어떻게 해결했을까. 지헌이라면.
당장에라도 정지헌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저러한 케이스인데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종일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로 씨름하다가, 문제집 맨 뒤에 수록된 답안지를 펼쳐 보고 싶은 학생처럼 손이 근질거렸다.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언제부터 정지헌이 옆에 있었다고 자연스럽게 의지하는 걸까. 좋지 않은 현상이다. 정지헌에게 기대는 게 익숙해지면 나중에 혼자가 됐을 때 넘어지지 않을까.
「리포트 다 썼어?」
휴대 전화가 울렸다. 타이밍 좋게 지헌에게서 온 문자였다. 머리 싸매고 끙끙거리는 내 상황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만큼 나를 잘 안다는 의미겠지. 불쑥 거부감이 치솟는다.
나는 일부러 딴짓하며 미적대다가 느지막이 답문을 보냈다.
「아니. 결론에서 막혔어.」
즉시 답문이 돌아왔다.
「내가 도와줘?」
점점 길어지는 답문 간격을 지헌이 알아채기를 바라면서, 이전보다 더 길게 시간을 두고 보냈다.
「나 혼자 할래. 네가 내 버릇을 망치고 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일부러 받지 않았다. 몇 분 후 문자가 도착했다.
「아직도 쓰고 있어? 벌써 자정 넘었는데 언제 자려고. 대충 쓰고 자.」
더는 신경 쓰기 싫어서 휴대 전화를 엎어 놨다. 볼펜 뒤 꽁다리를 잘근잘근 깨물며 고심하다가 최대한 교수님 입맛에 맞게 결론을 내렸다.
벌써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눈이 가물거리고 피곤이 몰려왔다. 아늑한 이불에 쓰러져 눕고만 싶었다.
그러나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리포트가 어깨를 짓눌렀다. 몰려드는 잠을 뿌리치고 헌법 교과서를 펼쳤다. 그래도 지헌과 스터디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아서 요새는 훨씬 몸이 편했다.
결국, 계획대로 정해진 분량을 끝내고 노트북을 덮었다.
잘 준비를 하고 애리 옆에 누워서 휴대 전화 알람을 맞추는데 한참 전에 도착한 정지헌의 문자가 깜박였다. 마지막 문자 이후 또 보낸 것이다.
「정 결론 내기 어려우면 입법적 미비이므로 앞으로 해결을 요한다, 그런 식으로 마무리해. 자기들이 봐도 답이 없는 문제라서 학생들한테 크게 기대하는 것도 없을 거야.」
그리고 직접 작성한 예시 답안과 도움이 되는 판례 몇 개를 파일로 보내왔다.
시간은 벌써 새벽 3시였다. 마지막 문자 이후 예시 답안을 보내기까지 두 시간의 간격이 있었다. 이 새벽에 급히 케이스를 푼 것이다. 그것도 내가 며칠 동안 끙끙댄 문제를 단 두 시간 만에. 짜증도 나고 자존심도 상한다.
정지헌은 날 도와주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가슴이 답답하다.
그때 또다시 문자가 왔다. 아직 내가 자고 있지 않은 걸 훤히 아는 사람처럼, 일부러 내가 무시하는 걸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문자는 연이어 도착했다.
새벽 2~3시에 답문이 없으면 보통은 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울컥 짜증이 치민다.
오기로 끝까지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다. 아예 휴대 전화를 가방 안에 넣어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애리 옆에 모로 누웠다.
밤새도록 문자 보내 보라지. 누가 답문하나.
그러고도 마음이 복잡해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아득바득 도와주겠다는 심리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근히 진드기 같은 면이 있다.
모르지. 오은성한테 이래서 차였을지도. 생긴 거답지 않게 사람을 질리게 한다.
그래도 애는 착해서.
정지헌과 관련해서 늘 되뇌던 말로 더는 덮고 넘어갈 수 없었다.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시험까지 남은 기간을 생각하면 한숨만 새어 나왔다.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내 방이다. 나는 정지헌이 내게 준 선물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다. 정지헌이 내게 여러모로 도움이 된 것은 맞지만, 그게 마냥 좋지는 않았다.
정지헌은 미묘하게 내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런 순간순간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성적으로 끌릴 수 있는 걸까. 정지헌과 가볍게 즐기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지헌이 달갑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나는 후련한 마음으로 정지헌이 준 선물들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늘 이렇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한쪽 구석에 선 지헌이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이었다.
나는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당당히 턱을 치켜들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정지헌이 내게 손을 뻗었다.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인 걸 아는데 가슴이 거칠게 두근거렸다. 흉흉한 지헌의 눈이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챌 것만 같다. 이마 위에 흥건한 땀을 훔쳐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쨍그랑! 부서지는 소리 후에 악악거리는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어디서 또 부부 싸움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 동네는 하루걸러 부부 싸움으로 경찰이 출동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때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심장은 불안하게 요동쳤다.
몇 시쯤 됐지?
머리맡을 더듬거리는데 휴대 전화를 가방에 넣어 뒀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망할 정지헌. 꿈자리까지 따라와서 괴롭힌다. 점점 더 커지는 고함에 허름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리를 잘 못 들었다. 쉭쉭, 특유의 거친 숨소리. 그때마다 독한 소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가까워지는 발걸음에는 목표물을 향해 다가오는 뱀 같은 교활함이 느껴졌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별로 놀랍지도 않다. 그저 지긋지긋할 뿐이다. 두툼한 손은 이불 속을 미끄러져 들어와 손가락 끝에 걸린 티셔츠를 들추고 속살을 더듬었다.
“허억… 허어억.”
바로 옆에서 기분 나쁠 정도로 거친 숨이 느껴졌다. 허벅지에 비벼지는 뜨끈한 것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욕이 튀어나왔다.
“으, 음.”
급히 신음으로 갈무리하며 몸을 뒤척이는 척 옆으로 몸을 굴렸다. 불청객은 흡, 하고 숨을 들이켜며 후다닥 손을 빼내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등신.”
바지춤을 잡고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런 간덩이로 의붓딸 건드릴 생각은 어떻게 했나 몰라. 화도 안 난다.
동트기 직전, 창밖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곤히 잠든 애리를 확인하고 카디건을 챙겨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맨발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 살며시 현관문을 밀었다.
쌀쌀한 새벽바람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찬 공기를 폐부 깊숙이 밀어 넣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담벼락에는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손님이 있었다.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친 낯이 익은 얼굴.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출근하고 출근하는 시간에 퇴근하는, 아마도 업소에서 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였다. 젊었을 때는 미모가 대단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두꺼운 화장으로도 고단함이 감춰지지 않았다.
여자는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퇴근하고 들어오는 길인지 외출복 차림에 옆에 놓인 편의점 비닐봉지 안에는 소주와 라면이 보였다.
“나도 한 대 줄래요?”
카디건 자락을 여미며 여자 옆에 섰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흘끗 보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뱃갑을 꺼내었다. 탁탁, 흔들어 한 개비 건네주고 라이터 불을 켜서 내 쪽에 가까이 대 주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고 여자 쪽으로 몸을 수그려 입에 문 담배 끝에 불을 가져다 대었다. 담배를 쥔 손끝이 살짝 떨렸다. 여자가 가볍게 웃으며 핀잔주었다.
“젊은 애가 왜 이렇게 손을 떨어.”
그제야 내가 떨고 있음을 알았다. 새아버지에 대한 역겨움으로 몸이 떨렸다.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들이켜자 떨리는 몸이 점차 안정되었다.
“고마워요.”
다시 한 모금 들이켜고 내뱉는 말에 여자가 내 쪽을 보았다.
“안 잔 거야, 일찍 일어난 거야?”
“자다 깼어요.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무슨 젊은 애가 벌써.”
“지금 퇴근하고 오는 길이에요?”
“그래, 피곤해 죽겠다.”
그러면서 주섬주섬 봉지를 챙겨 일어날 기색이었다.
“그거는 얼마 받아요?”
여자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집에 들어가기 싫었고 그냥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뭐?”
“그 일 하면 얼마 받아요?”
충동적으로 던진 질문이지만 묻고 보니 진짜 궁금했다. 저렇게 새벽까지 남자들 비위 맞춰서 버는 돈은 얼마일까. 여자의 황당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무슨 의도로 묻는 말인지 여자가 나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글쎄. 2차 뛰면 건당 10만 원 정도?”
“그거밖에 안 줘요?”
“가게하고 나눠야 하니까. 나야 한물가서 이 정도고 너는 플러스알파까지 하면 몇만 원 더 받긴 하겠다.”
플러스알파까지 해서 몇만 원이라니. 차라리 정지헌 비위 맞추고 사는 게 낫겠다. 비웃는 내게 여자가 덧붙였다.
“이걸로 돈 벌려면 차라리 공사 치는 게 더 빨라.”
“공사…?”
“스폰서 잡으라고.”
“스폰서 잡으면 목돈 벌 수 있어요?”
가볍게 던진 질문에 여자가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었다.
“요령 생겨서 팁만 잘 받아도 하루 평균 60~70에 한 달 하면 600~700도 가능해. 만근하면 천 단위도 벌 수 있고. 2차는 선택 사항이야. 싫으면 안 해도 돼. 버는 돈이야 좀 줄어들겠지만.”
“…….”
“방학 때만 잠깐 뛰는 대학생들도 많아. 생각 있으면 찾아와.”
나에게 명함을 건네준 여자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명함을 앞뒤로 살펴보았다. 하얀색 종이에 가게 전화와 이름만 적혀 있었다.
백합에 수향이? 아마도 가명이겠지. 요새는 업소 다니는 여자들도 명함을 갖고 다니나? 참 세상 좋아졌네.
나는 명함과 여자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긴 종업원이 아니라 퇴물 마담일 수도 있겠다.
스스로가 예쁘다는 자각은 있다. 특히나 이런 환경에서 자란 젊고 예쁜 여자의 존재는 늘 남자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어릴 때부터 남자들에게 성적인 대상이 되는 것에는 익숙하다.
이쪽 동네에 사는 형편이야 빤한 거고, 고등학교 때는 소위 노는 선배 무리에게 쉽게 돈 버는 방법을 권유받고는 했다.
그 선배들이 학교에서 얼굴 반반하고 형편 어려운 애들만 골라 업소로 알선하는 일을 했다는 건 나중에 안 일이었다.
희뿌옇게 날이 밝아 오고 있다. 멀리서 버스 첫차 운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함을 만지작거리다가 길가에 던져 버리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험 잘 봤냐?”
“소설 썼다.”
앞에 가는 학생들이 저희끼리 허탈하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학점 말아먹겠다고 작정하지 않은 이상, 대부분 학생은 목차는 외우고 들어간다. 그럼 일단 뼈대는 세울 수 있는데 문제는 살이 없으니 주저리주저리 헛소리만 늘어놓는 거다.
쓰면서도 ‘아, 이거 내가 헛소리하고 있구나.’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장수라도 채우면 노력이 가상해서 점수 주시겠지. 백지를 낼 수는 없으니 헛소리 쓰고 나온 후 자괴감이 물밀듯 밀려온다.
그런 상황을 주로 소설 쓴다고 표현하고는 했다.
정지헌에게 도움을 받기 전, 학원 모의고사에서 나도 몇 번 불의타4)를 맞고 법전을 베껴 가며 소설 쓴 적이 있었다.
화장실로 들어가 천천히 손을 씻었다. 거울 속에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있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차가운 손으로 볼을 만졌다.
교수는 B급에서 케이스 문제를 내고 A급에서 단문을 냈다. 케이스로 낼 만큼 쟁점이 많은 단원이 아니라서 모두 당황했다. B급에서 케이스라니. 반칙 아닌가? 그것도 초면인 판례였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학생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곧이어 촤라락, 하고 침묵 속에 법전 넘기는 소리만 무섭게 울렸다. 법전은 말하자면, 총이었다. 전쟁에서 유일하게 지급된 무기. 최대한 그것에 의지해 살아남아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법전을 앞뒤로 샅샅이 뒤적이고, 혹시라도 어디서 읽어 본 판례일까 기억을 더듬고, 각자 나름대로 쟁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헛다리 짚을 확률이 높다.
시험지 받자마자 목차 작성은 불문율이다. 그 시간에 쟁점을 찾기 위해 법전을 뒤적이며 보낸다는 건, 시작부터 망할 조짐이다. 법전을 뒤적이는 학생들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아서 하얗게 얼굴이 굳어 있다.
나는 시험지를 본 순간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모두 정지헌이 준 서브 노트에 있던 내용이었다. 심지어 가장 점수가 큰 케이스는 정지헌이 A급으로 찍어 준 판례였다.
시험지 여백에 미친 듯이 목차를 작성하고, 반흥분 상태로 90분 동안 정신없이 본문을 써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며 A 학점을 예감했다. 오랜만에 느껴 본 희열감이었다.
조교에게 시험지를 조심스레 제출하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아드레날린 과다 분비로 팔이 떨렸다. 담배 생각이 절실했다.
정지헌 불러서 담배나 피울까. 사실 담배는 핑계일 뿐, 시험장을 나오면서 가장 먼저 정지헌 생각이 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번 시험은 정지헌 공이 컸다.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 맞은 초등학생처럼 시험지 들고 정지헌에게 달려가 유치하게 자랑하고 싶었다. 정작 학창 시절 때는 숱하게 100점 맞아도 부모님께 자랑한 적 한 번 없으면서.
내가 정지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이렇게 컸던가 스스로 놀라웠다.
단과대 건물을 나오자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벚꽃이 흩날리는 벤치에 앉아서 먼저 시험장을 떠난 친구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난 날이라 모두 얼굴이 홀가분했다.
“선배, 유럽 여행은 어땠어요?”
정지헌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밝은 햇빛 아래서 지헌의 결 좋은 까만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응, 좋았어. 일정이 짧아서 다 못 둘러본 게 아쉬워. 다음엔 더 길게 가 보려고.”
지헌은 나직한 목소리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희! 시험 끝났어? 이리 와!”
나를 발견하고 승아 언니가 손짓했다. 지헌의 앞에 앉은 다은도 알은체를 했다. 그쪽으로 건너가려고 발걸음을 뗐을 때였다.
단과대 건물 앞으로 오은성이 지나가고 있었다.
“어….”
마구 손을 흔들던 승아 언니가 어색한 얼굴로 손을 내렸다. 사람들도 급격히 입을 다물고 정지헌 눈치를 살폈다.
지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은성을 응시했다. 오은성은 정지헌을 의식하며 천천히 테이블을 지나쳤다.
나는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감정의 찌꺼기가 남은 얼굴. 헤어지긴 했는데 말끔하게 끝나지는 못한, 둘만의 사정이 있어 보였다. 어쩌면 지금 현재 진행형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육체적인 쾌락만 즐긴 것뿐, 정지헌이 어디서 또 즐기고 다니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계단을 내려가 테이블 근처에 섰다. 정지헌은 또각또각 사라지는 오은성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뒤늦게 내 존재를 눈치채고 고개를 바로 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시험 잘 봤어?”
다은이 가볍게 웃으며 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에 놓으며 적당히 둘러댔다.
“그냥, 대충.”
“교수님 진짜 그걸 케이스로 낼 줄 몰랐어. 문제 좀 지저분하지 않아?”
“응, 좀 그렇더라.”
B급을 억지로 케이스로 내다 보니 문제가 조잡하긴 했다.
“그거 몇 년 전 판례라면서? 난 몰랐어. 완전 헛소리 쓰다 나왔네.”
다은이 말에 한쪽에서 대화하던 아이들이 흥분해서 말을 쏟아 냈다.
“무슨 하급심 판례를 학교 시험으로 내. 그런 걸 누가 찾아본다고.”
“야, 근데 기판력에서 상계 항변도 쓰는 거 맞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시간 없어서 그냥 나왔는데 찝찝하네. 쓸 걸 그랬나, 괜히 썼다가 마이너스 받을까 봐.”
“몰라. 난 그냥 법전 베껴 썼어. 쟁점이 뭔지도 모르겠더라.”
“나도 쟁점 다 못 썼어.”
“쟁점 많이 써도 소용없어. 민소 216조? 그거 언급 안 한 학생들 다 C 준대.”
“와, 말도 안 돼. 지헌아, 저 말 진짜야? 그 교수님 작년에도 저러셨어?”
아이들 시선이 모두 지헌을 향했다. 지헌은 애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법조문 누락했다고 무조건 C는 아니었고, 그래도 쟁점 많이 쓰면 B까지는 주셨던 것 같아.”
아…. 아이들이 모두 탄식했다. 나는 눈을 내리뜨고 무릎 위 가지런히 올린 손만 응시했다.
시험 전 정지헌에게 서브 노트를 받은 내 행동이 반칙처럼 느껴졌다. 지헌은 무슨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 참, 미희는 지헌이 잘 모르지?”
이어지는 말에 번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은이 정지헌을 가리켰다.
“승아 언니 사촌이래. 미희는 전과해서 잘 모를걸?”
“아니, 알아.”
커피를 집으려던 지헌이 시선을 돌려 의외라는 듯 나를 보았다. 뭐라고 대답하나 보자, 흥미로운 눈빛이었다.
“알아?”
다은이 묻는 말에 나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수업 시간에 본 적 있어. 그 행정법 첫 수업 때 있잖아.”
“맞아, 그때 대박이긴 했지.”
다들 수긍했다. 나는 정지헌을 보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
“응, 안녕.”
지헌이 피식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그러면서 턱을 괴고 내게 물었다.
“다들 어려웠다던데, 시험 잘 봤어?”
“응. 덕분에.”
“덕분에?”
“엊그제 본 채권법 말이야. 선배들이 준 족보 덕분에 잘 봤어. 특히 네 서브가 도움되더라고.”
“지헌이 서브 노트야 뭐 훌륭하지.”
승아 언니가 끼어들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아, 맞다. 미희 너 내일 시간 괜찮아?”
“왜요?”
“다은이 소개팅시켜 주려고 했는데 어머니 생신이래. 미희, 넌 시간 괜찮지?”
“시험 끝나서 여유 있긴 한데….”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승아 언니가 반색했다.
“잘됐다! 잠깐 점심때 보면 돼. 네가 대신 좀 나가 줘. 얘가 눈이 높아서 아무나 소개하기 좀 곤란했거든.”
“근데 난 소개팅은 별… 아!”
차가운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깍! 미희, 괜찮니?”
“왜, 누구 음료수 쏟았어?”
주위 친구들이 놀라서 웅성거렸다. 쏟아진 음료수 캔이 또르르 테이블 위를 굴러 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놀라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미안.”
정지헌이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쏴.
쏟아지는 물줄기에 셔츠를 최대한 잡아당겨 물에 적셔 비볐다. 앞자락에 쏟아진 음료수를 보니 ‘실수였어’ 사과하며 웃던 정지헌이 떠올랐다.
미안하면 웃지나 말든지. 차라리 싸가지 없는 무표정이 낫다. 웃으면 역시 재수 없어.
타월을 툭툭 셔츠에 두드려 물기를 제거했다. 드라이어를 켜고 최대한 셔츠를 말리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열렸다. 문가에 지헌이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야.”
묻는 말에도 지헌은 대답 없이 손만 뒤로 뻗어 문을 닫았다. 달칵,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귀찮아서 도망 나왔어.”
지헌은 어깨를 으쓱이며 벽에 기대섰다. 그러곤 담배를 만지작거리면서 화장실 창으로 벤치에 앉은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벤치 옆에는 경영학과 오은성이 다은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헌은 오은성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 어떤 시선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귀찮긴. 마주치면 곤란하니까 피한 거면서.
나는 피식 웃고 물에 젖은 손을 지헌의 셔츠에 마구 문질렀다. 지헌은 페인팅한 것처럼 크게 손자국이 난 가슴팍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내 티셔츠에는 지헌의 손자국보다 훨씬 큰 물 자국이 얼룩덜룩 남아 있었다. 물에 젖은 옷은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서 하얀 속옷을 선명히 드러냈다.
“볼만한데.”
내 꼴을 죽 훑어 내리며 지헌이 웃었다.
“덕분에. 고맙다.”
나도 씨익 웃으며 보란 듯이 손을 앞뒤로 지헌의 티셔츠에 문질렀다. 빳빳한 셔츠는 엉망으로 구겨졌다.
지헌은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웃더니 턱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나도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서로의 혀는 농밀하게 엉겨 붙었다.
“으음.”
지헌은 낮게 신음하며 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지헌의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지헌의 손목을 잡으며 밀어냈다.
“그만해.”
그래도 지헌은 고개를 비틀며 다가왔다. 나는 팔꿈치로 좀 더 강하게 지헌을 밀어냈다.
“나 과외 가야 해.”
단호한 말에 지헌은 아쉬운 표정으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데려다줄게.”
지헌의 뒤에 있는 창으로 벤치 옆에 서 있는 오은성이 보였다. 오은성은 아쉬운 얼굴로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나는 지헌을 밀어내려던 손으로 가슴부터 아래로 죽 손을 내리그었다. 다리 사이에서 부풀어 오른 성기가 만져졌다.
“…잠깐이라면 괜찮아.”
오은성한테 시선을 떼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지헌이 의아한 얼굴로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재빨리 지헌의 목덜미를 잡고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헌은 낮게 신음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지헌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스스럼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내 손이 닿자 지헌의 성기는 한층 더 부풀어 올랐다. 나는 예민한 살덩이를 거침없이 손에 쥐고 훑어 내렸다.
지헌은 눈을 내리뜨고 낮게 숨을 토해 냈다. 얼굴만 보면 평상시와 똑같이 차분하다. 오히려 금욕적인 느낌마저 든다. 간간이 얼굴을 찌푸리고 억누른 숨을 내쉴 때 얘가 흥분하긴 했구나, 싶었다.
갈라진 끝부분을 손으로 나긋이 문지르자 못 참겠다는 듯이 내 손을 겹쳐 잡았다. 그러곤 강한 압력으로 성기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더니 맥박 치는 느낌과 함께 울컥 파정했다.
“후으, 후으.”
지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 토해 내고도 반쯤 일어선 성기를 내 손바닥에 대고 진득하게 문질렀다. 하얀 정액들이 손가락을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그 느낌이 굉장히 이상했다.
내 손이 대단한 것인지, 고작 손 하나 갖고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정지헌이 대단한 것인지. 하여간 적당히 했으면 좋겠는데, 풀 같은 것이 연이어 쭉쭉 뿜어져 나왔다. 양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얘는 진짜 혼자 자위도 안 하나.
손가락 사이로 끈끈하게 흘러내리는 정액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는데 지헌이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
“먹어 볼래?”
“…….”
커피라도 한잔 권하듯 태연스러운 어조였다.
나는 가차 없이 돌아서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어 쏟아지는 물줄기에 손을 밀어 넣었다. 백탁액이 씻겨 내려가는 것을 지헌은 못내 아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화장실 창문 너머 멀리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기들이 보였다. 그 사이에서 매너 있는 척 정중하게 대화하던 지헌이 떠올랐다.
저렇게 단정하고 금욕적이게 생긴 놈한테 이런 변태 같은 면이 있는 줄은 아무도 모르겠지. 하긴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남자라면 질색을 해 놓고 뒤에서 맹랑하게 이런 짓 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어.
수도꼭지를 잠그자 지헌이 자연스럽게 페이퍼 타월을 뜯어 건네주었다.
“음, 근데 우리 언제까지 비밀로 해야 해?”
나는 타월에 손을 닦으며 무심히 되물었다.
“뭘.”
“이제 사귈 때도 됐잖아.”
하던 행동을 멈추고 지헌을 향해 돌아섰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응? 하고 다시 물었다.
“누가? 우리가?”
“나랑 이런 짓 하는데 안 사귄다고?”
지헌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말끝에 불편한 심기가 드러났다. 내 트집과 구박도 늘 여유롭게 넘기던 정지헌이기에, 드물게 보이는 날카로운 모습이 어색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난 우리가 서로 비슷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지헌이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했다.
“난 보수적이라 같이 자면 사귀는 거야.”
“…….”
보수적…. 퍽이나. 뭐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저기, 미안한데 우리가 같이 잤어?”
“삽입보다 더한 짓을 했지.”
애매한 얼굴로 웃는 내게 지헌이 이죽거렸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다.”
“그럼 사귀는 거 맞지?”
“글쎄. 너도 알다시피 시험도 얼마 안 남았고 우리한테는 지금이 중요한 시기잖아.”
곤란한 얼굴로 좋게 다독였다.
“우리는 목표가 같잖아. 뭐가 문제야. 계속 이렇게 네 옆에서 너 도와주고 싶어. 내가 잘해 줄게. 넌 앞으로도 나만 따라오면 돼.”
지헌이 내 볼을 감싸고 제법 진실한 눈으로 말했다. 그 눈빛의 떨림을 보고 있자면 지헌의 말을 믿고 싶었다. 지헌에게 기대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싫었다.
“…….”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지헌의 손을 밀어내고 웃었다.
“여기서 그런 말 들으니까 참 믿음직스럽다.”
지헌은 농담으로 빠져나가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봐주겠다는 듯 마지못한 얼굴로 나를 놓아주었다.
우리는 본관 뒤에 주차된 그의 차로 이동했다.
“피곤하면 좀 자 둬.”
지헌이 내비게이션에 주소 찍는 것을 보고 나는 좌석에 기대었다. 시험 후 남은 흥분이 모두 사라져 그제야 피곤이 몰려왔다. 이성이 돌아오고 조금 자괴감도 든다. 참 이것도 병이지 싶다.
정신없이 나가는 진도를 허겁지겁 소화시키고 나면 매주 강도 높은 케이스 시험이 돌아온다. 그런 생활을 몇 달간 지속하면 중압감과 초조함으로 신경이 바늘 끝처럼 날카로웠다.
그럴 때 지헌과 거칠고 더럽게 어울리면 그런 감정들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었다. 나도 가끔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그게 변태 같은 놈, 재수 없는 놈이라고 욕하면서 내내 정지헌과 어울리는 이유였다. 시험 끝날 때까지는 지헌의 자료가 아쉽기도 하고.
나는 마지노선을 2차 시험 때까지로 잡았다. 시험만 끝나면 저런 변태 같은 놈하고는 상종도 안 할 테다. 오래 두고 볼 놈은 아니었다.
“피곤할 텐데 좀 자.”
지헌이 내 쪽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나는 운전하는 지헌을 눈에 담았다. 능숙하게 운전하는 모습이 꽤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까는 졸렸는데 지금은 괜찮아.”
차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한참을 올라갔다. 어느 순간 넓고 구불구불한 길옆으로 대형 주택들이 보였다. 지헌이 차로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버스를 갈아타고 와서 저 길을 걸어 올라가느라 고생깨나 했겠다.
“차가 있으니까 편하긴 하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말에 지헌이 가볍게 웃었다.
“앞으로도 말만 해. 태워다 줄게.”
“이렇게 편하게 다니다가 걸어 다니면 불편할 것 같아.”
“계속 타고 다니면 되지. 뭐가 문제야.”
“…….”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잔잔한 흔들거림에 몸을 맡겼다. 일하지 않아도 되고, 공부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이 시간이 좋았다. 그냥 이렇게 끝도 없이 가고 싶었다.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데 차는 어느 대형 주택 앞에 멈추어 섰다. 고개를 기울인 지헌이 주택을 확인하며 말했다.
“끝나고 전화해.”
“왜?”
“기다릴게.”
“됐어. 그냥 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 치며 차 문을 여는데 지헌이 내 팔을 잡았다.
“혼자 집에 어떻게 간다고 그래. 기다릴게. 끝나기 전에 전화해.”
유치원생 대하듯 하는 모습이 우습다. 너 없을 때도 잘만 살았다. 이거저거 다 말하자니 귀찮았다. 과외 시간도 다가오고, 차라리 정지헌 스케줄을 지적했다.
“너 수업 있잖아.”
“수업 끝나고 올게.”
“뭐 하러 그래. 귀찮게.”
“끝나고 전화해.”
“…….”
그러든지 말든지. 길바닥에 버리는 게 네 시간이지 내 시간이냐. 똑똑한 애가 왜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사는지 모르겠다.
시큰둥한 반응에 지헌이 끝까지 밀어붙였다.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차에서 내려 벨을 누르는 모습을 지헌은 끝까지 지켜보았다.
너른 정원을 지나 저택으로 들어가자 일하시는 분이 응대했다.
“사모님 잠깐 통화 중이세요. 영우 군 방은 2층으로 올라가서 첫 번째 방이에요.”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가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성인이라 잠깐 멈칫했다. 얼굴이 내 친구라고 해도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하긴 나이로 치면 대학교 1학년이니 당연한 건가.
“와, 개 이뻐.”
멍하니 나를 보던 남자가 툭 내뱉었다. 입을 여니까 어린 티는 난다. 나는 한심한 눈으로 남자를 보았다. 체격만 크다 뿐이지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얼굴이 풋풋했다.
“일단 오늘은 간단히 테스트 좀 하자.”
책상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프린트물을 꺼내었다. 영우는 ‘에이, 오자마자 공부야.’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면서도 펜을 주워 들고 착실히 풀었다.
그래도 애는 착하긴 한 것 같다. 컨트롤하기 어렵진 않겠어. 다행이다.
영우는 휙휙 펜을 돌리는 여유까지 부리며 거침없이 문제를 풀었다. 요새는 잘사는 애들이 공부도 잘한다.
자연스럽게 생각은 정지헌에게로 이어졌다.
“이거는 단권화가 아니라 그냥 다 오려 붙인 거 같은데.”
“1회독 하고 벌써 케이스 들어가? 자신감이 대단하네. 난 3회독 해도 어렵던데.”
“과 수석이 별건가. 수업만 잘 들으면 쉬워.”
“이게 이해가 안 돼? 왜 이게 이해가 안 되지.”
“글쎄. 답안지가 교수님 눈에 띈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냐. 그만큼 훌륭한 답안지가 아니면 오히려 단점이 두드러지는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내가 볼 때 너는 그냥 중간이나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답안지로 너무 튀려고 애쓰지 마.”
잘난 놈인 건 사실인데 자꾸 은근슬쩍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한번은 작정하고 일본 쪽 어려운 케이스를 가져갔다. 잘난 척하더니 어디 얼마나 잘 푸나 보자, 못 풀기만 해 봐라, 단단히 별렀는데 그 케이스조차 수월하게 풀어 버리고.
“와, 너 어려운 거 푸는구나. 너 이러다 동차 합격하겠다. 재학 중 수석 타이틀까지 따겠는데?”
웃으며 농담하는 지헌에게 할 말을 잃었다.
그 뒤로 그 특유의 완벽함에 기가 질려 실력 테스트 하겠다는 생각조차 사그라들었다. 참 재수 없는데 너무 잘나서 인정할 수밖에 없고, 또 묘한 반발심이 든다. 나는 죽도록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을 너무 쉽게 해내는 사람을 보면서 드는 거부감과 자괴감이다.
처음에는 내 열등감 때문인가 헷갈렸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확실히 정지헌은 칭찬도 기분 나쁘게 하고 스터디할 때도 사람 자존심을 살살 긁었다.
“다 풀었어요.”
영우가 자신 있게 테스트지를 내밀었다.
“응, 이리 줘.”
정지헌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갈무리하고 테스트지를 받았다. 꽤 뿌듯해 뵈는 얼굴이 문제가 쉬웠나 보다. 나름대로 상위권 수준에 맞게 가져왔는데 난이도를 좀 올려야겠다고 긴장하며 색연필을 들었다.
“…….”
그러나 채점이 끝난 후 나는 심란한 눈으로 영우를 돌아보았다.
“너 일부러 이런 거니?”
“네? 뭐가요?”
“나한테 반항하려고?”
진지하게 묻는 말에 영우는 깜짝 놀라서 양손을 내저었다.
“아닌데요? 저 너무 열심히 풀어서 지금 머리 쥐 날 거 같은데요? 예쁜 선생님 오셔서 잘 보이고 싶어서 제 능력보다 더 무리했어요.”
억울하다는 얼굴이 진심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건 너무….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카이스트가 꿈이라고 들었는데.”
“꿈은 꿀 수 있죠.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내 꿈이 아니라 우리 엄마 꿈이에요.”
“…….”
헤헤, 하고 웃는 얼굴이 참 해맑다. 나는 할 말을 잃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수학 잘 못해요.”
안 좋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녀석이 변명하듯이 말한다. 수학? 나는 영우를 돌아보며 다정히 웃었다.
“영우야. 너는 수학을 못하는 게 아니야.”
“그래요?”
좋아서 웃으려던 영우는 이어지는 내 말에 시무룩해했다.
“수학이라는 단어도 너한테는 과분해. 넌 그냥 산수를 못하는 거야. 초등학생들이 하는 덧셈 뺄셈을 못하는 거라고.”
“얼굴은 완전 내 이상형인데 말은 진짜 못되게 하신다.”
“책이나 펴.”
그랬더니 툴툴거리며 수능용 자습서를 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도 전부 상위권 자습서들이다. 테스트지 구석에 풀어 놓은 걸 보면 분수끼리 덧셈 나눗셈도 제대로 못 하면서 기가 막힌다.
“저거 다 네가 산 거야?”
영우가 책장을 휘둘러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엄마가요. 근데 저거 그냥 장식용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일단 오늘은 앞 단원 조금만 나가자. 다음에 네 수준에 맞는 교재를 가져오도록 할게.”
“내 수준에 맞는 교재가 뭔데요?”
“사칙 연산 학습지 알지?”
“그거 초등학생 애들이 푸는 거 아니에요?”
“응. 맞아.”
“에이,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그냥 시간이나 때우다 가세요. 다른 쌤들도 다 그랬어요.”
“자, 1단원 기본 문제부터 볼까? 다항식….”
“어! 선생님 연예인 누구 닮았는지 이제 생각났어요.”
“…….”
그 뒤로 수업 시간 내내 틈만 나면 딴소리로 방해했다. 아예 공부할 생각이 없고 기초 과정에 구멍 난 부분이 너무 많아 견적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걸 계속해 말아, 회의감에 휩싸인 내 고민은 단시간에 끝이 났다. 현관 입구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두툼한 하얀 봉투를 들고 기다리고 계셨다.
“사모님이 외출하시면서 전해 주라고 하셨어요.”
“…….”
눈앞에 내밀어지는 봉투는 너무 큰 유혹이었다. 결국, 집을 나오는 내 손에는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저택에서 나오자 담벼락에 주차된 정지헌의 차가 보였다. 수업을 갔다 온 건지 아예 안 간 건지 모르겠다.
가끔 내가 이해 못 할 부분에서 지헌은 강경하게 나왔다. 나한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어서 대부분 마음대로 하게 두는 편이었다.
그렇게 해서 네가 행복하다면 마음대로 해라.
이번 일 역시 입씨름하기 싫어서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랐다.
“나오기 전에 전화하라고 했잖아.”
“잔소리 그만하고 출발해.”
잔소리를 한마디로 일축하고 좌석에 머리를 기대었다. 가능성 없는 아이는 맡지 않는다는 과외 원칙을 깨고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아 와서 마음이 불편했다.
“왜, 무슨 일 있어?”
“과외하는 애 때문에.”
“말을 안 들어?”
“아니. 애는 착한데 실력이 바닥이야.”
“그런 애들 많지. 그냥 적당히 시간이나 때워. 뭘 고민해.”
지헌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동안 내가 맡은 학생들은 상위권부터 하위권까지 실력이 다양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다들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이란 점이었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학생을 맡는 건 피차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재수생인 아이가 간단한 나눗셈조차 버벅대더라, 초등학생보다도 수학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지헌한테 영우 상태를 설명했다.
지헌은 운전하면서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가끔 자신이 과외받았던 경험담도 말해 주고 맞장구쳐 주기도 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상황이 어이없어서 스스로 웃음이 나고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허름한 골목 입구에서 지헌의 차가 서행하다가 멈추었다. 동네는 재개발 문제로 주변이 어수선했다.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린 지헌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부수다 만 건물이며 빨간 플래카드를 훑어보았다.
나는 지헌에게 구질구질한 내 환경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였다. 거기에는 네가 이래도 나를 계속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오기 어린 마음도 있었다.
다은이나 승아 언니에게는 애써 감추는 것들을 왜 지헌에게 보이는 건 아무렇지 않은 걸까.
나는 그 차이를 좀 더 잘 보이고 싶은 상대, 앞으로도 계속 볼 인연과 아닌 것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지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고, 앞으로 계속 이어 나갈 인연도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정지헌이 뒷좌석에서 커다란 쇼핑백을 꺼내었다.
“이거 뭐야?”
“노트북 고장 나서 리포트 쓸 때 고생했잖아. 이걸로 하라고.”
“…….”
가까이 다가온 지헌이 내 손에 쇼핑백을 쥐여 주고 턱을 잡아 올렸다. 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지헌을 마주했다.
“오래 안 기다려. 네가 할 수 있는 답변도 하나야. 삽입보다 더한 짓을 해 놓고 같이 안 잤다니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잖아. 안 그래?”
“…….”
“들어가. 오늘까지 리포트 써야 한다며.”
지헌은 뚜벅뚜벅 운전석으로 걸어갔다. 곧 조용한 골목길에 자동차 떠나는 소리가 울렸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 마음이 무겁다. 참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왜 사서 고생하는 걸까. 인생이 너무 심심해서 자극이 필요한가.
어디 가면 뒤처지는 거 없이 멀쩡한 놈이 뭐가 아쉽다고 나한테 들러붙어 구박받고 있는지 생각하면 짠하고, 그러면서도 나만 나쁜 사람 만드는 것 같아 곱빼기로 짜증 나고.
정지헌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원래 같이 고생하다 보면 끈끈한 정이 생기는 걸까. 학원을 같이 다니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 후회된다.
그렇다고 이대로 끝내는 것도 찜찜하고. 차라리 한 번 자는 게 어떨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섹스가 돌파구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키스가 거부감 들지 않으니 섹스도 괜찮겠지. 그런데,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같이 자도 되나? 이게 정상 맞나?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진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골목 안쪽에 들어서자 허름한 떡볶이집 간판이 보였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있는 가게는 떡볶이집이라는 간판에 어울리지 않게 술에 취해 흥청망청 떠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채 간판을 바꾸지 못해 떡볶이집 간판을 그대로 달고 있지만 해가 지면 동네 한량들이 어슬렁거리며 가게로 모여들어 밤새도록 술을 퍼마시는, 열린 문 사이로 벽에 걸린 여자 나체 사진이 보이는 그런 구질구질한 가게.
엄마의 두 번째 남편이 하는 가게였다.
아니, 식 안 올린 남자까지 따지면 다섯 번째던가? 엄마가 데려오는 남자는 갈수록 형편없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돈이라도 많은 놈을 만나든가. 만나는 놈들마다 저 모양이었다.
“남자가 싫은 거야, 아니면 내가 싫은 거야?”
정지헌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엄마가 데려오는 남자들은 다 형편없었지만, 그중에 세 번째 남자는 특히 최악이었다. 열일곱 살 비 오던 밤, 엄마와 맨발로 야반도주했던 일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남자와 엮여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데 남자를 싫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언니!”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애리가 후다닥 품으로 뛰어들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애리는 고개를 들어 배시시 웃었다.
“왜 나와 있어. 저녁 먹었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묻자, ‘으응’ 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손을 꼭 붙들었다.
“언니랑 같이 먹으려고.”
“언니 늦는다고 했잖아.”
애리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혼자 먹기 싫어.”
아직 어린데 혼자 먹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다는 걸 안다. 일곱 살에 외로움을 알아 버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 안쓰럽다.
“애리 오늘은 뭐 했어? 언니가 내 준 숙제 다 했어?”
애리는 쪼르르 마루 위에서 공책을 가져왔다. 이아리. 공책 한 면에 빽빽이 써진 이름. 내년이면 학교 들어갈 나이인데 아직 제 이름 석 자도 제대로 못 쓴다. 또래보다 체구도 작아서 모르는 사람은 다섯 살 정도로 짐작한다.
엄마와 새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애리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부모님이 장사를 나가고 나면 빽빽 우는 아이를 그냥 두고 보기만 했다. 공부에 열중하다가 뒤돌아보면 울다 지쳐 잠들어 있던 동생. 그때 기억은 지금도 미안한 마음으로 남아 있다.
나는 이 아이가 예쁜 여자로 자라지 않기를 바란다. 독기 있거나 똑똑하지 않은, 무르고 예쁜 여자의 말로가 어떤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언니가 볶음밥 해 줄까?”
“와와, 볶음밥!”
손뼉 치고 좋아하는 애리 머리를 쓰다듬고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었다. 한쪽 다리를 세우고 쭈그려 앉은 엄마는 커다란 양푼에 밥을 비벼 먹고 있었다.
“저녁 안 먹었음 어여 숟가락 들고 오고.”
엄마가 내게 손짓했다.
“애리 가서 먹을래?”
애리를 쳐다보자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위해 주는 사람을 안다고 하던가. 애리는 엄마보다 내가 챙겨 주는 걸 더 좋아했다. 학부모 상담 때면 엄마 오지 말고 언니가 오라고 밤새도록 징징거려 몇 번 대신 가 준 적도 있었다.
한번은 길에서 애리 친구들과 만났는데 다들 나를 애리 엄마로 알고 인사했더랬다. 알고 보니 애리가 학교에 온 나를 보고 우리 엄마라고 거짓말한 것이었다. 생각하면 딱하기도 해서 나는 매번 애리의 거짓말을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됐어. 김치볶음밥 해서 애리랑 먹을게.”
머리를 대충 틀어 묶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밥통을 열어 밥을 확인하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는데 엄마가 뒤에서 슬그머니 물어 왔다.
“느이 아버지 아직도 술 드시던?”
나는 대꾸도 하지 않고 김치를 쫑쫑 썰어 프라이팬에 넣었다. 엄마가 목청을 높였다.
“어? 올 때 느이 아버지 가게 안 지나왔어?”
탁, 주걱을 거칠게 내려놓고 돌아섰다.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매번 부득불 느이 아버지라고 갖다 붙이는 심보를 이해할 수가 없다.
“누가 아버지야.”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애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쟤가 또 왜 저러나, 엄마는 멍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가 이내 억울한 얼굴로 하소연했다.
“언제까지 그럴 건데. 내가 나 좋자고 재혼했니?”
하, 나는 대차게 비웃었다.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 아빠 만들어 주려고 재혼한 거잖아.”
“엄마가 원해서 한 거잖아. 엄마 좋자고 한 거지, 내 핑계 대지 마.”
“너 나한테 그러면 안 돼. 나 위자료도 안 받고 너 하나 데리고 나온 사람이야.”
휴지를 꺼낸 엄마는 눈물을 찍어 내며 18번인 신세 한탄을 시작할 기세였다.
이젠 씨알도 안 먹히는 방법을 왜 자꾸 고수하는지 모르겠다. 처음엔 엄마 곁에 있는 남자들이 싫었는데, 이제는 매번 당하면서도 남자 없이 못 사는 엄마가 징그러웠다.
나는 들은 척도 않고 밥을 볶다가 방을 향해 소리쳤다.
“이애리, 밥 먹으러 나와!”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다. 말투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애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아기 때 그렇게 자주 울던 애리는 이제 울지 않는다. 웃지도 않는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알아 버린 모습이 잊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입맛이 쓰다.
“꼭꼭 씹어 먹어.”
불안하게 만든 게 미안해서 표정을 풀고 다정히 애리 머리를 쓰다듬자, 애리는 소처럼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며 숟가락 가득 밥을 퍼서 입에 욱여넣었다.
“이건 뭐야?”
방에서 나온 엄마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다. 안에서 화장품 세트가 줄줄이 나왔다. 정지헌이 노트북 말고 다른 것도 챙겨 넣은 모양이었다.
“이거 비싼 거 같은데?”
화장품 세트를 풀어 헤친 엄마는 로션 뚜껑을 열어 킁킁 냄새를 맡아 보고 손등에 발라 비벼 보고 난리였다. 내 통박에 시무룩해 있더니 금세 기운을 회복해서 신난 얼굴이었다.
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행 갔다 와서, 화이트 데이라서, 무슨 날마다 정지헌에게 받은 선물이 모으면 꽤 되었다. 내 소지품은 어느새 그의 선물로 채워졌다.
고만고만한 애들 틈에서 깔끔하고 잘생긴 정지헌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남자에게 무감하게 살아왔지만, 나도 보는 눈이 있고 잘생긴 사람을 보면 확실히 눈이 즐겁다.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체격을 볼 때면 저절로 잠자리가 연상되어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왜 사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걸까. 정지헌을 보는 내 마음은 왜 싸늘한지 모르겠다.
노트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버벅거리는 고물 노트북 들고 씨름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긴 하다. 쓰다 만 리포트를 펼쳐 놓고 복잡한 상념을 지우려 노력했다.
밥을 다 먹은 애리가 조용히 들어와 이불 위에 눕는 소리가 들렸다. 반듯이 누운 애리를 보고 불을 끄고 스탠드를 켰다.
곧 뒤에서 쌔근쌔근 잠에 곯아떨어진 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책상에 앉긴 했는데 밤이 깊도록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목차를 복사해 결론에 우려먹어도 되긴 하지만 좀 더 독창적인 결론을 맺고 싶었다.
정지헌이라면 어떻게 해결했을까. 지헌이라면.
당장에라도 정지헌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저러한 케이스인데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종일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로 씨름하다가, 문제집 맨 뒤에 수록된 답안지를 펼쳐 보고 싶은 학생처럼 손이 근질거렸다.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언제부터 정지헌이 옆에 있었다고 자연스럽게 의지하는 걸까. 좋지 않은 현상이다. 정지헌에게 기대는 게 익숙해지면 나중에 혼자가 됐을 때 넘어지지 않을까.
「리포트 다 썼어?」
휴대 전화가 울렸다. 타이밍 좋게 지헌에게서 온 문자였다. 머리 싸매고 끙끙거리는 내 상황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만큼 나를 잘 안다는 의미겠지. 불쑥 거부감이 치솟는다.
나는 일부러 딴짓하며 미적대다가 느지막이 답문을 보냈다.
「아니. 결론에서 막혔어.」
즉시 답문이 돌아왔다.
「내가 도와줘?」
점점 길어지는 답문 간격을 지헌이 알아채기를 바라면서, 이전보다 더 길게 시간을 두고 보냈다.
「나 혼자 할래. 네가 내 버릇을 망치고 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일부러 받지 않았다. 몇 분 후 문자가 도착했다.
「아직도 쓰고 있어? 벌써 자정 넘었는데 언제 자려고. 대충 쓰고 자.」
더는 신경 쓰기 싫어서 휴대 전화를 엎어 놨다. 볼펜 뒤 꽁다리를 잘근잘근 깨물며 고심하다가 최대한 교수님 입맛에 맞게 결론을 내렸다.
벌써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눈이 가물거리고 피곤이 몰려왔다. 아늑한 이불에 쓰러져 눕고만 싶었다.
그러나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리포트가 어깨를 짓눌렀다. 몰려드는 잠을 뿌리치고 헌법 교과서를 펼쳤다. 그래도 지헌과 스터디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아서 요새는 훨씬 몸이 편했다.
결국, 계획대로 정해진 분량을 끝내고 노트북을 덮었다.
잘 준비를 하고 애리 옆에 누워서 휴대 전화 알람을 맞추는데 한참 전에 도착한 정지헌의 문자가 깜박였다. 마지막 문자 이후 또 보낸 것이다.
「정 결론 내기 어려우면 입법적 미비이므로 앞으로 해결을 요한다, 그런 식으로 마무리해. 자기들이 봐도 답이 없는 문제라서 학생들한테 크게 기대하는 것도 없을 거야.」
그리고 직접 작성한 예시 답안과 도움이 되는 판례 몇 개를 파일로 보내왔다.
시간은 벌써 새벽 3시였다. 마지막 문자 이후 예시 답안을 보내기까지 두 시간의 간격이 있었다. 이 새벽에 급히 케이스를 푼 것이다. 그것도 내가 며칠 동안 끙끙댄 문제를 단 두 시간 만에. 짜증도 나고 자존심도 상한다.
정지헌은 날 도와주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가슴이 답답하다.
그때 또다시 문자가 왔다. 아직 내가 자고 있지 않은 걸 훤히 아는 사람처럼, 일부러 내가 무시하는 걸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문자는 연이어 도착했다.
새벽 2~3시에 답문이 없으면 보통은 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울컥 짜증이 치민다.
오기로 끝까지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다. 아예 휴대 전화를 가방 안에 넣어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애리 옆에 모로 누웠다.
밤새도록 문자 보내 보라지. 누가 답문하나.
그러고도 마음이 복잡해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아득바득 도와주겠다는 심리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근히 진드기 같은 면이 있다.
모르지. 오은성한테 이래서 차였을지도. 생긴 거답지 않게 사람을 질리게 한다.
그래도 애는 착해서.
정지헌과 관련해서 늘 되뇌던 말로 더는 덮고 넘어갈 수 없었다.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시험까지 남은 기간을 생각하면 한숨만 새어 나왔다.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내 방이다. 나는 정지헌이 내게 준 선물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다. 정지헌이 내게 여러모로 도움이 된 것은 맞지만, 그게 마냥 좋지는 않았다.
정지헌은 미묘하게 내 자존심을 건드렸고, 그런 순간순간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성적으로 끌릴 수 있는 걸까. 정지헌과 가볍게 즐기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지헌이 달갑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나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나는 후련한 마음으로 정지헌이 준 선물들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늘 이렇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한쪽 구석에 선 지헌이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이었다.
나는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당당히 턱을 치켜들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정지헌이 내게 손을 뻗었다.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인 걸 아는데 가슴이 거칠게 두근거렸다. 흉흉한 지헌의 눈이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챌 것만 같다. 이마 위에 흥건한 땀을 훔쳐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리서 쨍그랑! 부서지는 소리 후에 악악거리는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어디서 또 부부 싸움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 동네는 하루걸러 부부 싸움으로 경찰이 출동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때마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심장은 불안하게 요동쳤다.
몇 시쯤 됐지?
머리맡을 더듬거리는데 휴대 전화를 가방에 넣어 뒀다는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다.
망할 정지헌. 꿈자리까지 따라와서 괴롭힌다. 점점 더 커지는 고함에 허름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그래서 처음에는 소리를 잘 못 들었다. 쉭쉭, 특유의 거친 숨소리. 그때마다 독한 소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가까워지는 발걸음에는 목표물을 향해 다가오는 뱀 같은 교활함이 느껴졌다.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별로 놀랍지도 않다. 그저 지긋지긋할 뿐이다. 두툼한 손은 이불 속을 미끄러져 들어와 손가락 끝에 걸린 티셔츠를 들추고 속살을 더듬었다.
“허억… 허어억.”
바로 옆에서 기분 나쁠 정도로 거친 숨이 느껴졌다. 허벅지에 비벼지는 뜨끈한 것의 정체를 깨닫는 순간 욕이 튀어나왔다.
“으, 음.”
급히 신음으로 갈무리하며 몸을 뒤척이는 척 옆으로 몸을 굴렸다. 불청객은 흡, 하고 숨을 들이켜며 후다닥 손을 빼내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등신.”
바지춤을 잡고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런 간덩이로 의붓딸 건드릴 생각은 어떻게 했나 몰라. 화도 안 난다.
동트기 직전, 창밖은 아직 어두컴컴하다. 곤히 잠든 애리를 확인하고 카디건을 챙겨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맨발에 슬리퍼를 꿰어 신고 살며시 현관문을 밀었다.
쌀쌀한 새벽바람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래도 찬 공기를 폐부 깊숙이 밀어 넣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담벼락에는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손님이 있었다. 오다가다 몇 번 마주친 낯이 익은 얼굴.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출근하고 출근하는 시간에 퇴근하는, 아마도 업소에서 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여자였다. 젊었을 때는 미모가 대단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두꺼운 화장으로도 고단함이 감춰지지 않았다.
여자는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퇴근하고 들어오는 길인지 외출복 차림에 옆에 놓인 편의점 비닐봉지 안에는 소주와 라면이 보였다.
“나도 한 대 줄래요?”
카디건 자락을 여미며 여자 옆에 섰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흘끗 보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뱃갑을 꺼내었다. 탁탁, 흔들어 한 개비 건네주고 라이터 불을 켜서 내 쪽에 가까이 대 주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고 여자 쪽으로 몸을 수그려 입에 문 담배 끝에 불을 가져다 대었다. 담배를 쥔 손끝이 살짝 떨렸다. 여자가 가볍게 웃으며 핀잔주었다.
“젊은 애가 왜 이렇게 손을 떨어.”
그제야 내가 떨고 있음을 알았다. 새아버지에 대한 역겨움으로 몸이 떨렸다.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들이켜자 떨리는 몸이 점차 안정되었다.
“고마워요.”
다시 한 모금 들이켜고 내뱉는 말에 여자가 내 쪽을 보았다.
“안 잔 거야, 일찍 일어난 거야?”
“자다 깼어요.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무슨 젊은 애가 벌써.”
“지금 퇴근하고 오는 길이에요?”
“그래, 피곤해 죽겠다.”
그러면서 주섬주섬 봉지를 챙겨 일어날 기색이었다.
“그거는 얼마 받아요?”
여자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집에 들어가기 싫었고 그냥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뭐?”
“그 일 하면 얼마 받아요?”
충동적으로 던진 질문이지만 묻고 보니 진짜 궁금했다. 저렇게 새벽까지 남자들 비위 맞춰서 버는 돈은 얼마일까. 여자의 황당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무슨 의도로 묻는 말인지 여자가 나를 찬찬히 뜯어보다가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글쎄. 2차 뛰면 건당 10만 원 정도?”
“그거밖에 안 줘요?”
“가게하고 나눠야 하니까. 나야 한물가서 이 정도고 너는 플러스알파까지 하면 몇만 원 더 받긴 하겠다.”
플러스알파까지 해서 몇만 원이라니. 차라리 정지헌 비위 맞추고 사는 게 낫겠다. 비웃는 내게 여자가 덧붙였다.
“이걸로 돈 벌려면 차라리 공사 치는 게 더 빨라.”
“공사…?”
“스폰서 잡으라고.”
“스폰서 잡으면 목돈 벌 수 있어요?”
가볍게 던진 질문에 여자가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내었다.
“요령 생겨서 팁만 잘 받아도 하루 평균 60~70에 한 달 하면 600~700도 가능해. 만근하면 천 단위도 벌 수 있고. 2차는 선택 사항이야. 싫으면 안 해도 돼. 버는 돈이야 좀 줄어들겠지만.”
“…….”
“방학 때만 잠깐 뛰는 대학생들도 많아. 생각 있으면 찾아와.”
나에게 명함을 건네준 여자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명함을 앞뒤로 살펴보았다. 하얀색 종이에 가게 전화와 이름만 적혀 있었다.
백합에 수향이? 아마도 가명이겠지. 요새는 업소 다니는 여자들도 명함을 갖고 다니나? 참 세상 좋아졌네.
나는 명함과 여자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긴 종업원이 아니라 퇴물 마담일 수도 있겠다.
스스로가 예쁘다는 자각은 있다. 특히나 이런 환경에서 자란 젊고 예쁜 여자의 존재는 늘 남자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어릴 때부터 남자들에게 성적인 대상이 되는 것에는 익숙하다.
이쪽 동네에 사는 형편이야 빤한 거고, 고등학교 때는 소위 노는 선배 무리에게 쉽게 돈 버는 방법을 권유받고는 했다.
그 선배들이 학교에서 얼굴 반반하고 형편 어려운 애들만 골라 업소로 알선하는 일을 했다는 건 나중에 안 일이었다.
희뿌옇게 날이 밝아 오고 있다. 멀리서 버스 첫차 운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함을 만지작거리다가 길가에 던져 버리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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