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빛, 내 생명의 불꽃, ... -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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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녀와 야수
주희와 민서는 다시 단짝이 되어 어울렸다.
토요일에는 민서가 우리집에서 자고 가거나 주희가 민서네 집에서 자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토요일 민서가 밤까지 주희랑 놀다가 집에 가겠다고 해서 밤길이 위험하다며 내가 바래다 주었다. 이왕 간 김에 수경의 얼굴이나 보고 갈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아파트에까지 들어갔다.
얇은 잠옷 차림의 수경은 내가 온 것이 뜻밖인 듯 약간 놀란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약간 수척해졌지만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이 뽀얗게 투명한듯한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속살이 비칠 듯 말듯한 잠옷에 감춰져 있는 몸매에 나는 숨이 멎는 듯 했다.
나는 어색해져서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차나 한잔 마시려고 왔는데....”
“네.. 들어오세요.”
수경은 망설이는듯하더니 마지못해 나를 들어오라고 한 다음 방으로 들어가서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나는 차를 마시며 이런 것 저런 것을 이야기 했다. 수경의 근황을 묻고 전화번호를 알아 두었다.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힘 쓰는 일이라면 자신 있으니까...”
나는 수경의 집을 나오면서 말을 했다.
오늘은 집을 알아두고 전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은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 하다고 생각 했다.
그 후 수경이 청하지는 않았지만 유아원에도 찾아가서 몇 가지 일을 도와주고 집에도 찾아가서 무거운 물건을 옮겨주거나 못을 박아주는 일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그런 행동을 부담스러워 하고 만류를 했지만 반복되면서 수경은 남편이 없는 빈자리를 대신해서 조금씩 나에게 의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경이 도움을 청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성심 성의껏 도와주었다. 언젠가는 아이들을 태워 주는 통학차 운전기사가 개인적인 일 때문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난감해진 수경이 나에게 연락을 해와서 내 친구가 도와주게 한적도 있었다.
4월로 접어들던 어느날 주희와 민서가 현장 학습을 가게 되었다.
나는 그날 아내에게는 전화를 해서 회식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퇴근길에 안주거리 몇 가지와 양주 한 병을 사가지고 수경의 집에 들렀다.
수경이 운영하는 유아원은 오후 4시면 끝나기 때문에 일찍 집에 들어와서 쉬고 있었다.
조금 거북해 하는 수경을 나는 반 강제로 밀고 들어갔다.
“수경씨. 오늘은 오랜만에 나랑 술 한 잔 해요.”
“준비된 것도 없는데...”
“술하고 안주는 내가 준비해 왔으니까 그냥 마시기만 해요,”
술을 어느 정도 마시고 나자 나는 오늘 여기에 찾아온 목적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미리 머리 속에 정리해온 말이었지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수경씨 좋아하는 것 알아요?”
“.........”
“3년 전 처음 봤을 때,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혼자 좋아했어요.”
“진우씨. 그러시면 안 되요.”
“알아요. 머리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가슴은 수경씨를 좋아하게 되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나도 진우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남자답고 포용력이 있어서 좋았고, 혜진 언니와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가정에 충실해서 민서 아빠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부러워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건 아니에요. 진우씨에게는 혜진 언니가 있고 더구나 주희하고 주영이를 봐서라도 이러시면 안 되요.”
수경은 좋은 말로 나를 설득해서 사태를 되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확고했고 더구나 이미 쏟아 내버린 말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 감정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지금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3년 전에 싹텄던 감정이 자라서 이제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요. 내가 병이 나서 죽는다면 수경씨 때문일 겁니다.”
“진우씨. 이러지 마세요. 내가 이혼하고 혼자 산다고 이러시는 건가요? 내가 혼자 사니까 날 가볍게 보고 무시하는 거에요?”
“........”
“진우씨. 오늘 취했어요. 그만 집으로 들어가세요.”
다음으로 나타난 수경의 반응은 냉담했다.
처음부터 쉽게 마음을 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예상 밖의 강한 거부 반응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나만 우스워질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할까 망설였다. 감언이설로 꼬드겨 볼까 아니면 Cool하게 ‘한번 하자’ 할까 하다가 두 가지 다 마음에 안 들어서 내 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수경씨. 내 말 더 들어 보세요. 집에 가더라도 할 말은 하고 가야 되겠네요. 수경씨 말이 맞아요. 수경씨가 이혼 하지 않았다면 이런 말 할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수경씨를 가볍게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이혼 전에도 내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만한 기회가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이제야 겨우 내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할 수 있게 된 겁니다.”
“..........”
“내가 수경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리고 수경씨를 가볍게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죠?”
“알아요. 진우씨 나쁜 사람 아니라는 것 알아요. 그렇지만 이혼이라도 하고 저랑 살 거예요? 그럴 수는 없을 것 아니에요?”
“내가 결혼을 한 후로 한 눈 팔지 않고 여태까지 아이들 엄마와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아왔어요. 내가 가꾸어왔던 가정을 지금도 소중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수경씨를 알고부터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만약에 서로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났다면 내 모든 것을 다 걸고 도전해 볼 텐데 하는 생각도 했고, 사회 윤리가 뭐길래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지 못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을 감추고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 인생을 희생만 하고 낭비해버리기엔 아깝다고 생각해요. 내가 나이가 들면서 이런 뜨거운 정열이 사라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수경씨에 대한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기만 해요. 내 마음을 알아 주기만이라도 한다면 좋겠어요.”
“........”
“수경씨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또 나만의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내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고 싶진 않아요. 그러면서도 수경씨의 사랑을 얻고 싶은 욕심이에요. 내 솔직한 심정이니까 욕을 해도 별 수 없지만 욕하지는 말아주세요.”
“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해요.... 그러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지 않나요?”
“나는 수경씨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지 않아요. 나와 만나면서 또 다른 남자를 만나고 결혼을 한다 할지라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단지 수경씨의 지금 현재의 느낌과 솔직한 그대로의 마음에 맡기라는 겁니다. 친구처럼 연인처럼 지낼 수 없을까요?”
대화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나는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약해진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의 상태보다는 날카로움과 첨예한 대립은 없었지만 대화의 진도는 지지부진 했고 같은 내용이 반복될 뿐 더 이상 진척을 볼 수 없었다.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까? 마침내 수경에게서 그만 돌아가라는 축객령이 떨어졌다.
“됐어요. 더 이상 얘기해 봐야 결론은 같아요.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한편으로는 내 마음을 털어놓아서 시원했고 또 한편으로는 다시는 수경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 때문에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경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에 비해서 훨씬 강경했고 부정적인 것이었다. 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을 할 것을 잘못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내 마음속의 이기심을 너무 솔직하게 말 한 것이 수경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조금 거짓말을 보태더라도 기분 좋은 말을 많이 해줄 걸 잘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리하지 않고 Cool하게 적당한 선에서 말한 것이라고 애써 위안을 했다. 어차피 남자의 구애를 한번에 수락할 만큼 자존심이 없는 여자였다면 내가 좋아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 시작이라고 다짐하며 각오를 다시 새롭게 했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다시 수경의 유아원에 찾아갔다.
며칠 전의 일은 잊어버린 듯 가장하고 밝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수경의 반응을 예리하게 살폈다. 수경도 약간은 과장된 듯하기도 하고 안정되지 않은 표정으로 명랑한 척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를 위한 차를 준비하는데 허둥대는 모습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며칠 전의 수경의 태도로 보아 꾀나 깐깐해 보였지만 지금의 모습을 볼 때는 너무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나의 고백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섣부르지만 이제 수경의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내가 리드만 잘하면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그러나 서두르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차를 마시며 일상적인 대화와 몇 가지 우스개 소리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데 주력했다. 수경도 내심 안심하는 듯하며 평상을 회복하는 것이 느껴졌다.
앞으로 잘 될 것 같은 희망을 발견한 나는 전화로 또는 직접 찾아가는 방법으로 수경과의 접촉을 계속 이어갔다. 우선 표면적으로는 지난번의 고백에 대한 부담감을 없애는 것이 필요했지만 실질적으로 그 부담감이 없어지는 것도 경계하였다.
대화를 할 때 나는 말을 하는데 있어 최대한 가벼운 주제를 선택했다. 그리고 말투도 친밀감을 주기위해서 자연스럽게 반말 투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미모나 태도 등을 고려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은 것이었다. 자꾸만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에서 조심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수경도 먹고, 싸고, 질투하고, 화를 내는 내 아내나 나와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주지시키곤 하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원칙을 세워서 최대한 거기에 맞추려고 노력 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전화를 하거나 찾아갔다. 직접 만나는 때는 저녁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가능하면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가지려고 애를 썼다. 예를 들면 이야기를 하면서 제스처를 크게 하면서 팔이나 어깨를 건드린다든지, 식사나 차를 마실 때는 가끔 나란히 앉아서 서로 어깨를 부딪히게 하였다.
연락하는 간격에도 신경을 써서 어떤 때는 일부러 2주일 동안 연락을 안 하기도 하면서 수경의 반응을 살폈다. 내 연락이 뜸할 때는 수경이 적극적이 되고 궁금해 하는 것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이벤트를 생각하던 나는 수경의 생일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수경의 생일은 내가 수경의 아파트로 찾아가 고백을 한 시점으로부터 두 달 정도가 지난 6월이었다. 전에 관심을 같고 알아두었던 것인데 수경의 생일을 이용해서 이벤트를 꾸미면 커다란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생일 이틀 전에 수경에게 찾아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만 가야겠다고 작별 인사를 하고 약간 미적거리다가 준비해간 비장의 말을 꺼냈다.
“모레 저녁에 약속 있어?”
모레 금요일은 수경의 생일이다.
수경의 주변 친구나 친척과의 약속이 미리 잡혀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설령 약속이 잡혀 있을지라도 나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면 선약을 취소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 또는 그 반대 상황으로 약속이 없지만 약속이 있다고 나와의 만남을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 마음을 담은 선물을 전달함으로써 내 목적은 한 발짝 가까워지는 것이다.
하여튼 수경의 답변 여부는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아뇨. 없는데요.”
“아! 그럼 잘 되었네. 그날 나를 위해서 시간 좀 빌려줘요.”
“무슨 일 때문인데요?”
“수경씨 모레가 무슨 날인지 몰라? 하여튼 시간을 내줄 수는 있지?”
“.........”
“그럼 그렇게 약속한 걸로 알고 간다. 내일 다시 전화 할께.”
갑작스럽게 허를 찔린 수경이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나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하고 나왔다.
수경이 내 일방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내 기분은 한껏 고조되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이벤트를 만들 것인지 고민을 했다.
양평에 있는 회사의 접대용 별장을 이용해서 이벤트를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무리를 하는 것은 오히려 부담감을 키울 것 같아서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인 이벤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식사는 빠질 수 없는 항목이고 더불어 영화, 나이트클럽, 음악회, 뮤지컬, 오페라 등을 고려해 봤다. 영화는 너무 평범하다. 나이트클럽은 한 번 같이 가 보았지만 약간 속 보이는 것 같다. 음악회나 오페라는 다소 무겁다. 밝고 경쾌한 뮤지컬이 좋겠다. 외모에서 귀족 풍이 느껴지는 수경에게는 음악회나 오페라, 뮤지컬 같은 고전적인 것들이 어울릴 것 같지만 의외로 대중적인 것을 좋아하는 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클래식한 것들 중에서 비교적 가벼운 뮤지컬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다음날 나는 일단 인터넷을 뒤져서 강남의 모 아트 홀에서 공연중인 ‘미녀와 야수’를 예약했다. 그리고 식사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하고 싶었지만 뮤지컬 공연 시간이 식사를 해야 할 시간과 어중간해서 간단히 한정식 집에서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면 그때 가서 술을 한잔 하든 할 생각으로 그 뒤 스케줄은 비워 놓았다.
그리고 백화점에 들러 향수와 스카프를 예쁘게 포장해서 산 다음 수경에게 전화를 했다.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밝고 가벼운 목소리로 약속을 상기시켰다.
“수경씨 너무 직장과 집에만 있으면 정신 건강에 안 좋아. 가끔 바람도 쐬고 문화 생활도 해야 된다구. 뮤지컬 공연 티켓을 구해 놓았으니까 내일 어린이집 끝나고 나오세요.”
망설이는 수경에게 나는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고 꼭 나오라는 다짐을 받았다. 수경은 마지 못한 듯 나오겠다고 승낙을 했다.
남편과 이혼하고 맞는 첫번째 생일을 내가 챙겨주게 된 것도 나에게는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약속시간에 비해서 넉넉하게 회사를 마치고 약속장소로 갔다. 차를 파킹하고 역으로 나가서 기다렸다.
가벼운 정장차림의 수경은 금방 눈에 띄었다.
투명한 듯 얇은 화장만으로도 빛나는 얼굴과 밝고 가벼운 옷 속에 감추어진 몸매가 내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나는 수경의 매혹적인 자태와 나의 데이트 신청에 응해준 반가운 마음에 당장 껴안고 입 맞춤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식사를 하고 나자 적당하게 공연시간이 되었다.
식당에서도 극장에 들어가면서도 농담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도했다. 수경도 즐거운 목소리로 호응을 해왔다.
공연장에 들어가서 조명이 어두워지자 고전적이 코스대로 먼저 손을 잡고 다음에는 어깨위로 팔을 둘렀다. 몇 차례 가볍게 거부를 하던 수경도 포기를 한 듯 나에게 기대왔다.
화려한 성에 사는 이기적인 왕자.
마녀의 저주로 흉측한 야수로 변한다.
장미꽃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또한 그녀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마법이 풀릴 것이다…
공연은 나름대로 좋았다.(공연요금이 비쌌으므로…)
나는 수경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내 쪽으로 당겨서 머리를 마주 댔다. 그리고 반대편 손은 수경의 손을 잡았다. 수경도 어둠의 힘을 빌려 나에게 머리를 기댔다. 부드러운 머리 결이 내 뺨을 간질거리며 수경의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구름에 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고, 저 밑바닥에서는 뜨거운 것이 불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수경을 만나고 나서부터 계속 그런 느낌이었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평소에도 수경을 생각만하면 그렇게 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가끔 볼을 마주 대거나 얼굴을 수경쪽으로 돌려 귀속 말을 하면서 서로의 숨결을 느끼는 정도의 스킨십만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농도가 짙은 애무를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스킨십도 만족할만한 진도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올 때는 자연스럽게 연인처럼 팔장을 끼고 나왔다.
나는 수경에게 의견을 물으면서 차를 몰아서 생각해 놓았던 Live Café로 안내했다.
웨이터에게 생일 케이크를 부탁하고 자리에 앉아서 준비한 선물을 주었다.
“나는 마법에 걸려서 못난이 야수가 됐어. 수경씨만이 그 마법을 풀 수 있겠는데…”
“나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어요.”
수경은 말로는 사양하면서도 이제는 상당히 고무되어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 음악이 연주되면서 감동은 극에 달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수경과 나란히 앉아서 가볍게 칵테일을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청춘 시절의 향수를 음미했다.
어쩌면 오늘, 오랫동안 벼르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오늘 수경을 러브호텔로 데리고 가면 따라올까? 순순히 응해줄까? 냉정히 생각해 봤을 때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아니 성공 확률이 60%는 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거부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거기다 오늘 내가 너를 즐겁게 해줬으니 너도 내 욕심을 풀어주라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는 판단도 들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이 친밀해졌지만 아직까지 수경은 어느 정도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오늘 즐겁게 의미 있는 날로 기억되게 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12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었다.
“수경씨 이제 그만 갈까?”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수경은 지금 이 시간이 아쉬운 듯 하면서 일어섰다.
나도 무척 아쉬웠다.
당장 차를 러브호텔로 몰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하지만 애써 참으며 묵묵히 수경의 집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집이 가까워지자 수경이 말했다.
“오늘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생일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진우씨가 아니었으면 잊고 지나 갈 뻔했는데…”
“수경씨가 좋아하니까 나도 기분이 좋은데… ”
나는 오늘 최소한 키스 정도까지는 진도를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보답으로 뽀뽀 한 번 안될까?”
수경이 내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 이건 반칙이야. 나는 준비도 안 돼 있잖아?”
“뽀뽀 하는데 반칙이 어디 있어? 그것도 특별히 해 준 건데…”
“다시 정식으로 한 번 하자.”
“안 되요. 빨리 가기나 해요.”
“좋아. 그럼 아까처럼 다시 한 번만… ”
내가 차를 세울 듯이 속도를 늦추며 재촉하자 수경이 다시 내 볼에 입맞춤 하려고 몸을 기울여 왔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수경의 입술에 맞닿게 했다. 그리고 서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둡지 않았으면 아마 수경은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그날 난 아쉽지만 수경을 고이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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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와 민서는 다시 단짝이 되어 어울렸다.
토요일에는 민서가 우리집에서 자고 가거나 주희가 민서네 집에서 자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토요일 민서가 밤까지 주희랑 놀다가 집에 가겠다고 해서 밤길이 위험하다며 내가 바래다 주었다. 이왕 간 김에 수경의 얼굴이나 보고 갈려고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아파트에까지 들어갔다.
얇은 잠옷 차림의 수경은 내가 온 것이 뜻밖인 듯 약간 놀란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약간 수척해졌지만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이 뽀얗게 투명한듯한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속살이 비칠 듯 말듯한 잠옷에 감춰져 있는 몸매에 나는 숨이 멎는 듯 했다.
나는 어색해져서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차나 한잔 마시려고 왔는데....”
“네.. 들어오세요.”
수경은 망설이는듯하더니 마지못해 나를 들어오라고 한 다음 방으로 들어가서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나는 차를 마시며 이런 것 저런 것을 이야기 했다. 수경의 근황을 묻고 전화번호를 알아 두었다.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힘 쓰는 일이라면 자신 있으니까...”
나는 수경의 집을 나오면서 말을 했다.
오늘은 집을 알아두고 전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놓은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 하다고 생각 했다.
그 후 수경이 청하지는 않았지만 유아원에도 찾아가서 몇 가지 일을 도와주고 집에도 찾아가서 무거운 물건을 옮겨주거나 못을 박아주는 일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그런 행동을 부담스러워 하고 만류를 했지만 반복되면서 수경은 남편이 없는 빈자리를 대신해서 조금씩 나에게 의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경이 도움을 청하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성심 성의껏 도와주었다. 언젠가는 아이들을 태워 주는 통학차 운전기사가 개인적인 일 때문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난감해진 수경이 나에게 연락을 해와서 내 친구가 도와주게 한적도 있었다.
4월로 접어들던 어느날 주희와 민서가 현장 학습을 가게 되었다.
나는 그날 아내에게는 전화를 해서 회식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퇴근길에 안주거리 몇 가지와 양주 한 병을 사가지고 수경의 집에 들렀다.
수경이 운영하는 유아원은 오후 4시면 끝나기 때문에 일찍 집에 들어와서 쉬고 있었다.
조금 거북해 하는 수경을 나는 반 강제로 밀고 들어갔다.
“수경씨. 오늘은 오랜만에 나랑 술 한 잔 해요.”
“준비된 것도 없는데...”
“술하고 안주는 내가 준비해 왔으니까 그냥 마시기만 해요,”
술을 어느 정도 마시고 나자 나는 오늘 여기에 찾아온 목적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미리 머리 속에 정리해온 말이었지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수경씨 좋아하는 것 알아요?”
“.........”
“3년 전 처음 봤을 때,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혼자 좋아했어요.”
“진우씨. 그러시면 안 되요.”
“알아요. 머리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가슴은 수경씨를 좋아하게 되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나도 진우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남자답고 포용력이 있어서 좋았고, 혜진 언니와 아이들에게 자상하고 가정에 충실해서 민서 아빠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부러워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건 아니에요. 진우씨에게는 혜진 언니가 있고 더구나 주희하고 주영이를 봐서라도 이러시면 안 되요.”
수경은 좋은 말로 나를 설득해서 사태를 되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확고했고 더구나 이미 쏟아 내버린 말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 감정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지금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3년 전에 싹텄던 감정이 자라서 이제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요. 내가 병이 나서 죽는다면 수경씨 때문일 겁니다.”
“진우씨. 이러지 마세요. 내가 이혼하고 혼자 산다고 이러시는 건가요? 내가 혼자 사니까 날 가볍게 보고 무시하는 거에요?”
“........”
“진우씨. 오늘 취했어요. 그만 집으로 들어가세요.”
다음으로 나타난 수경의 반응은 냉담했다.
처음부터 쉽게 마음을 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예상 밖의 강한 거부 반응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나만 우스워질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할까 망설였다. 감언이설로 꼬드겨 볼까 아니면 Cool하게 ‘한번 하자’ 할까 하다가 두 가지 다 마음에 안 들어서 내 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수경씨. 내 말 더 들어 보세요. 집에 가더라도 할 말은 하고 가야 되겠네요. 수경씨 말이 맞아요. 수경씨가 이혼 하지 않았다면 이런 말 할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수경씨를 가볍게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이혼 전에도 내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만한 기회가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이제야 겨우 내 마음속에 있는 말을 전할 수 있게 된 겁니다.”
“..........”
“내가 수경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그리고 수경씨를 가볍게 보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죠?”
“알아요. 진우씨 나쁜 사람 아니라는 것 알아요. 그렇지만 이혼이라도 하고 저랑 살 거예요? 그럴 수는 없을 것 아니에요?”
“내가 결혼을 한 후로 한 눈 팔지 않고 여태까지 아이들 엄마와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아왔어요. 내가 가꾸어왔던 가정을 지금도 소중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수경씨를 알고부터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만약에 서로가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났다면 내 모든 것을 다 걸고 도전해 볼 텐데 하는 생각도 했고, 사회 윤리가 뭐길래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지 못하고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을 감추고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 인생을 희생만 하고 낭비해버리기엔 아깝다고 생각해요. 내가 나이가 들면서 이런 뜨거운 정열이 사라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수경씨에 대한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커지기만 해요. 내 마음을 알아 주기만이라도 한다면 좋겠어요.”
“........”
“수경씨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또 나만의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내 가정의 평화를 깨뜨리고 싶진 않아요. 그러면서도 수경씨의 사랑을 얻고 싶은 욕심이에요. 내 솔직한 심정이니까 욕을 해도 별 수 없지만 욕하지는 말아주세요.”
“남자들은 다 똑같아요.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해요.... 그러면 내가 너무 비참해지지 않나요?”
“나는 수경씨의 사생활에 간섭하고 싶지 않아요. 나와 만나면서 또 다른 남자를 만나고 결혼을 한다 할지라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단지 수경씨의 지금 현재의 느낌과 솔직한 그대로의 마음에 맡기라는 겁니다. 친구처럼 연인처럼 지낼 수 없을까요?”
대화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나는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약해진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의 상태보다는 날카로움과 첨예한 대립은 없었지만 대화의 진도는 지지부진 했고 같은 내용이 반복될 뿐 더 이상 진척을 볼 수 없었다.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까? 마침내 수경에게서 그만 돌아가라는 축객령이 떨어졌다.
“됐어요. 더 이상 얘기해 봐야 결론은 같아요.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한편으로는 내 마음을 털어놓아서 시원했고 또 한편으로는 다시는 수경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 때문에 괜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경의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에 비해서 훨씬 강경했고 부정적인 것이었다. 내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대응을 할 것을 잘못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내 마음속의 이기심을 너무 솔직하게 말 한 것이 수경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조금 거짓말을 보태더라도 기분 좋은 말을 많이 해줄 걸 잘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리하지 않고 Cool하게 적당한 선에서 말한 것이라고 애써 위안을 했다. 어차피 남자의 구애를 한번에 수락할 만큼 자존심이 없는 여자였다면 내가 좋아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제 시작이라고 다짐하며 각오를 다시 새롭게 했다.
며칠이 지난 후 나는 다시 수경의 유아원에 찾아갔다.
며칠 전의 일은 잊어버린 듯 가장하고 밝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수경의 반응을 예리하게 살폈다. 수경도 약간은 과장된 듯하기도 하고 안정되지 않은 표정으로 명랑한 척 인사를 했다. 그리고 나를 위한 차를 준비하는데 허둥대는 모습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며칠 전의 수경의 태도로 보아 꾀나 깐깐해 보였지만 지금의 모습을 볼 때는 너무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나의 고백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섣부르지만 이제 수경의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내가 리드만 잘하면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그러나 서두르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차를 마시며 일상적인 대화와 몇 가지 우스개 소리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데 주력했다. 수경도 내심 안심하는 듯하며 평상을 회복하는 것이 느껴졌다.
앞으로 잘 될 것 같은 희망을 발견한 나는 전화로 또는 직접 찾아가는 방법으로 수경과의 접촉을 계속 이어갔다. 우선 표면적으로는 지난번의 고백에 대한 부담감을 없애는 것이 필요했지만 실질적으로 그 부담감이 없어지는 것도 경계하였다.
대화를 할 때 나는 말을 하는데 있어 최대한 가벼운 주제를 선택했다. 그리고 말투도 친밀감을 주기위해서 자연스럽게 반말 투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미모나 태도 등을 고려할 때 그렇게 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은 것이었다. 자꾸만 욕심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에서 조심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수경도 먹고, 싸고, 질투하고, 화를 내는 내 아내나 나와 똑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주지시키곤 하였다.
그리고 나는 나의 원칙을 세워서 최대한 거기에 맞추려고 노력 했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전화를 하거나 찾아갔다. 직접 만나는 때는 저녁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가능하면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가지려고 애를 썼다. 예를 들면 이야기를 하면서 제스처를 크게 하면서 팔이나 어깨를 건드린다든지, 식사나 차를 마실 때는 가끔 나란히 앉아서 서로 어깨를 부딪히게 하였다.
연락하는 간격에도 신경을 써서 어떤 때는 일부러 2주일 동안 연락을 안 하기도 하면서 수경의 반응을 살폈다. 내 연락이 뜸할 때는 수경이 적극적이 되고 궁금해 하는 것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이벤트를 생각하던 나는 수경의 생일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수경의 생일은 내가 수경의 아파트로 찾아가 고백을 한 시점으로부터 두 달 정도가 지난 6월이었다. 전에 관심을 같고 알아두었던 것인데 수경의 생일을 이용해서 이벤트를 꾸미면 커다란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생일 이틀 전에 수경에게 찾아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만 가야겠다고 작별 인사를 하고 약간 미적거리다가 준비해간 비장의 말을 꺼냈다.
“모레 저녁에 약속 있어?”
모레 금요일은 수경의 생일이다.
수경의 주변 친구나 친척과의 약속이 미리 잡혀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에게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설령 약속이 잡혀 있을지라도 나와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면 선약을 취소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 또는 그 반대 상황으로 약속이 없지만 약속이 있다고 나와의 만남을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 마음을 담은 선물을 전달함으로써 내 목적은 한 발짝 가까워지는 것이다.
하여튼 수경의 답변 여부는 나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아뇨. 없는데요.”
“아! 그럼 잘 되었네. 그날 나를 위해서 시간 좀 빌려줘요.”
“무슨 일 때문인데요?”
“수경씨 모레가 무슨 날인지 몰라? 하여튼 시간을 내줄 수는 있지?”
“.........”
“그럼 그렇게 약속한 걸로 알고 간다. 내일 다시 전화 할께.”
갑작스럽게 허를 찔린 수경이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나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정하고 나왔다.
수경이 내 일방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내 기분은 한껏 고조되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이벤트를 만들 것인지 고민을 했다.
양평에 있는 회사의 접대용 별장을 이용해서 이벤트를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한꺼번에 너무 무리를 하는 것은 오히려 부담감을 키울 것 같아서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인 이벤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식사는 빠질 수 없는 항목이고 더불어 영화, 나이트클럽, 음악회, 뮤지컬, 오페라 등을 고려해 봤다. 영화는 너무 평범하다. 나이트클럽은 한 번 같이 가 보았지만 약간 속 보이는 것 같다. 음악회나 오페라는 다소 무겁다. 밝고 경쾌한 뮤지컬이 좋겠다. 외모에서 귀족 풍이 느껴지는 수경에게는 음악회나 오페라, 뮤지컬 같은 고전적인 것들이 어울릴 것 같지만 의외로 대중적인 것을 좋아하는 편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클래식한 것들 중에서 비교적 가벼운 뮤지컬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다음날 나는 일단 인터넷을 뒤져서 강남의 모 아트 홀에서 공연중인 ‘미녀와 야수’를 예약했다. 그리고 식사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하고 싶었지만 뮤지컬 공연 시간이 식사를 해야 할 시간과 어중간해서 간단히 한정식 집에서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면 그때 가서 술을 한잔 하든 할 생각으로 그 뒤 스케줄은 비워 놓았다.
그리고 백화점에 들러 향수와 스카프를 예쁘게 포장해서 산 다음 수경에게 전화를 했다.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밝고 가벼운 목소리로 약속을 상기시켰다.
“수경씨 너무 직장과 집에만 있으면 정신 건강에 안 좋아. 가끔 바람도 쐬고 문화 생활도 해야 된다구. 뮤지컬 공연 티켓을 구해 놓았으니까 내일 어린이집 끝나고 나오세요.”
망설이는 수경에게 나는 만날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고 꼭 나오라는 다짐을 받았다. 수경은 마지 못한 듯 나오겠다고 승낙을 했다.
남편과 이혼하고 맞는 첫번째 생일을 내가 챙겨주게 된 것도 나에게는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약속시간에 비해서 넉넉하게 회사를 마치고 약속장소로 갔다. 차를 파킹하고 역으로 나가서 기다렸다.
가벼운 정장차림의 수경은 금방 눈에 띄었다.
투명한 듯 얇은 화장만으로도 빛나는 얼굴과 밝고 가벼운 옷 속에 감추어진 몸매가 내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나는 수경의 매혹적인 자태와 나의 데이트 신청에 응해준 반가운 마음에 당장 껴안고 입 맞춤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식사를 하고 나자 적당하게 공연시간이 되었다.
식당에서도 극장에 들어가면서도 농담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도했다. 수경도 즐거운 목소리로 호응을 해왔다.
공연장에 들어가서 조명이 어두워지자 고전적이 코스대로 먼저 손을 잡고 다음에는 어깨위로 팔을 둘렀다. 몇 차례 가볍게 거부를 하던 수경도 포기를 한 듯 나에게 기대왔다.
화려한 성에 사는 이기적인 왕자.
마녀의 저주로 흉측한 야수로 변한다.
장미꽃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고 또한 그녀에게 사랑을 받는다면 마법이 풀릴 것이다…
공연은 나름대로 좋았다.(공연요금이 비쌌으므로…)
나는 수경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내 쪽으로 당겨서 머리를 마주 댔다. 그리고 반대편 손은 수경의 손을 잡았다. 수경도 어둠의 힘을 빌려 나에게 머리를 기댔다. 부드러운 머리 결이 내 뺨을 간질거리며 수경의 향기가 느껴졌다.
나는 구름에 둥실 떠 있는 기분이었고, 저 밑바닥에서는 뜨거운 것이 불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수경을 만나고 나서부터 계속 그런 느낌이었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평소에도 수경을 생각만하면 그렇게 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가끔 볼을 마주 대거나 얼굴을 수경쪽으로 돌려 귀속 말을 하면서 서로의 숨결을 느끼는 정도의 스킨십만을 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농도가 짙은 애무를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스킨십도 만족할만한 진도였다.
공연이 끝나고 나올 때는 자연스럽게 연인처럼 팔장을 끼고 나왔다.
나는 수경에게 의견을 물으면서 차를 몰아서 생각해 놓았던 Live Café로 안내했다.
웨이터에게 생일 케이크를 부탁하고 자리에 앉아서 준비한 선물을 주었다.
“나는 마법에 걸려서 못난이 야수가 됐어. 수경씨만이 그 마법을 풀 수 있겠는데…”
“나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어요.”
수경은 말로는 사양하면서도 이제는 상당히 고무되어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 음악이 연주되면서 감동은 극에 달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수경과 나란히 앉아서 가볍게 칵테일을 마시고 음악을 들으며 청춘 시절의 향수를 음미했다.
어쩌면 오늘, 오랫동안 벼르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오늘 수경을 러브호텔로 데리고 가면 따라올까? 순순히 응해줄까? 냉정히 생각해 봤을 때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아니 성공 확률이 60%는 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만약 거부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거기다 오늘 내가 너를 즐겁게 해줬으니 너도 내 욕심을 풀어주라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는 판단도 들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이 친밀해졌지만 아직까지 수경은 어느 정도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오늘 즐겁게 의미 있는 날로 기억되게 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12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었다.
“수경씨 이제 그만 갈까?”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수경은 지금 이 시간이 아쉬운 듯 하면서 일어섰다.
나도 무척 아쉬웠다.
당장 차를 러브호텔로 몰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하지만 애써 참으며 묵묵히 수경의 집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집이 가까워지자 수경이 말했다.
“오늘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생일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진우씨가 아니었으면 잊고 지나 갈 뻔했는데…”
“수경씨가 좋아하니까 나도 기분이 좋은데… ”
나는 오늘 최소한 키스 정도까지는 진도를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말했다.
“보답으로 뽀뽀 한 번 안될까?”
수경이 내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 이건 반칙이야. 나는 준비도 안 돼 있잖아?”
“뽀뽀 하는데 반칙이 어디 있어? 그것도 특별히 해 준 건데…”
“다시 정식으로 한 번 하자.”
“안 되요. 빨리 가기나 해요.”
“좋아. 그럼 아까처럼 다시 한 번만… ”
내가 차를 세울 듯이 속도를 늦추며 재촉하자 수경이 다시 내 볼에 입맞춤 하려고 몸을 기울여 왔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수경의 입술에 맞닿게 했다. 그리고 서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둡지 않았으면 아마 수경은 얼굴이 붉어졌을 것이다.
그날 난 아쉽지만 수경을 고이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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