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의 머나먼 여정 ( 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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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꿈은 이루어진다.
장차 내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꿈에도 모른다.
외곽 고속도로의 톨게이트를 빠져 시내로 진입하는 초입에 규모가 작은 간이휴게소가 있다.
최근 들어 일을 쉬고 있는 아라는 미리 왔었는지, 애마의 보닛 열기가 완전히 식어 있었다.
은발이 드문드문 섞인 가발만 벗고 운전대를 잡자, 왕 비서는 이내 아라의 애마를 몰고 휴게소에서 사라져갔다. 혹시나 모를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는 방법이다.
긴 머리를 말아 올려 하얀 뜨개 소재의 모자를 쓰고, 커다란 잠자리 안경으로 조막만 한 얼굴을 반이나 가린 아라는 자연스럽게 내 차로 다가왔다.
“피곤해 보인다. 운전 하느라 힘들었구나. 많이 기다렸니?”
“조금. 시간 넉넉해 천천히 왔어요. 민낯이니 창백해 보여서 그런가? 요즘 늘어지게 쉬는데...”
“봐봐! 선글라스 벗고.”
처음이 아니라 내가 뭘 하려는지 아라는 알고 있다. 간단하게 서너 군데 특수한 화장을 하면 얼굴이 감쪽같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변장술이다.
“히~! 역시 오라버닌 신비해. 오늘은 싸가지 년 오승아 닮았잖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안전띠를 채워 차를 출발시켰다.
“저녁이면 아직 바닷바람이 찰 텐데, 횟집에서 식사나 할까?”
“바다 보고 싶어! 해변 카페에서 술도 마시고 싶고, 나이트에 가서 춤도 추고, 하고 싶은 게 많아.”
“술은 안돼. 오빠, 운전해야 하잖아”
“그럼 호텔에서 룸서비스 시키면 돼. 받아 보고 난 뒤에.”
“호텔이라니? 나, 청죽도 들어갈 텐데, 아라는 이따 왕 비서 차 태워서 보내고.”
“싫어! 오늘은 꼭 자고 갈 거야. 다음 달부터 영화랑 드라마 겹치기 촬영 들어가면 시간 정말 없단 말야”
“하여간 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간이 안 가요. 넌, 오빠랑 비디오 찍은 거 무섭지도 않아?”
“그게 뭐 어때서. 그거 뿌리면 난 더 좋지 뭐. 이것저것 다 때려치우고 죽자 살자 한사람에게만 매달리면 되니까.”
사람들이 들끓지 않는 조용한 해변도 운치가 있지만 그런 곳은 숙박시설이 빈약한 곳이 많다.
남의 눈에 띌 위험은 있지만 때론 과감하게 유명 관광지를 찾아 거리낌 없이 노는 것도 좋다.
스릴이 있다. 하긴 누가 알아봐도 긴가민가할 테지만 말이다.
아직 남자 맛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아라. 나를 만나면 막무가내로 잠을 같이 자자니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안 선다.
“아무튼 어영부영 승이 떼서 다른 차에 태울 생각하지 마. 저번 때처럼 신고해 버릴 테니까...”
연기자의 직업의식이랄까? 변장을 조금 시켰더니 아라는 대번에 자신을 승아라고 한다. 미리 실수를 방지한다는 예방 차원에서는 훌륭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큭! 신고? 말도 마라!
오월비상이란 옛말이 하나도 안 틀린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그 말 말이다.
아라 고집이 장난 아니다.
그날도 자고 가자는 걸 억지로 달래, 다른 차를 오게 해 태웠더니, 떡하니 112 상황실에다 전화를 걸어서는 조폭들한테 납치 중이라고.
고속도로 순찰대까지 출동하고 장난 아니었다.
아라는 그 얄팍한 어깨까지 으쓱하며 의기양양해라 한다.
그렇다면 뭐, 운전하는 나를 위해 서비스 차원으로 바지 지퍼라도 좀 내려주면 좋으련만, 또 그런 건 순진한 건지 숙맥인지 해줄 줄도 모른다.
윤아나 지민인 차에만 올라탔다 하면, 물고 빨고 심지어 카섹스라면 환장을 하는데 말이다.
민락의 해 오름은 먼 친척 조카뻘되는 운서가 주인으로 있는 꽤 괜찮은 활어회 전문 식당이다
물론 운서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만큼 나는 고독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여럿 아니, 숱한 사람들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보안은 철저하다.
주말이 아닌 탓에 가게 안은 한산하진 않았지만, 테이블 손님들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눈에 번쩍 띄는 쭉쭉 빵빵 늘씬한 미녀와 얼굴에 칼자국이 쭉 난 사내가 들어서니, 저마다 한 번씩은 쳐다본다. 고개를 갸웃하는 치들도 있다.
그들 중 이십 대 젊은 남자 네 명이 생선회에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 앞이 바다를 향한 창가의 자리라 그쪽으로 갔다.
감성돔과 오가피주를 시키고 따로 소주도 한 병 추가해 주문했다.
술을 두 병이나 주문하자 아라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다. 적당히 술에 취하면 대리를 부르든 택시를 이용하든 멀지 않은 해운대 호텔로 가야 할 테니까.
하지만 내 속셈은 그게 아니었다. 술 취했다는 핑계로 왕 비서나 청죽도 성재를 불러 운전을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동상이몽이었다.
준비 음식이 나오고 막 잔을 채우는데 앞 테이블에 앉아있던 스포츠머리의 청년이 한 손에 메모지를 덜렁거리며 우리 쪽으로 온다.
기가 찰 노릇이다. 내 변장술이 이렇게 뛰어나단 말인가? 아라도 어이가 없는지, 한참 멍하니 가타부타 대답이 없다.
그러자 녀석들은 무언이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우르르 이쪽으로 몰려왔다. 두 녀석은 잽싸게 폰카까지 들이대며 셔터를 누르려고 폼을 잡았다
“어허! 오승아가 누구야? 그리고 함부로 카메라 들이대면 초상권 침해로 콩밥 먹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어느 지방인지도 모를 사투리를 섞어 주절댔으나, 보아하니 쉽게 물러갈 녀석들이 아니었다. 폼새가 조금 바닥 물을 먹은 놈들 같았다.
“에헤이, 아재는 가만있으쇼! 매니전가 본데, 우린 그냥 승아 씨 사인 한 장이면 되여라”
“글쎄, 오승아가 누군지 모르지만, 번지를 잘못 찾았소, 술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가쇼.”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하지만 오빠 말대로 나 진짜 오승아 아니니까 가세요.”
아라가 마지 못해 한마디 거들고 나서자 녀석들은 저들끼리 뭐라고 쑥덕거리는게 들린다.
“하긴 뭐. 오승아가 이런 데 와서 이 시간에 술 마시려구.”
“아냐! 맞아. 일부러 연막 치는 거야. 괜히 인터넷에 뜨기라도 해봐. 난리가 나재...”
“일구 말도 맞고, 춘식이 말도 맞다. 진짜 오승아라면 저런 좀생이를 데리고 다니겠어? 한 번 움직이면 경호원이 몇 명씩 쭉 들러붙던데. 쪽은 죽인다!”
자식들, 얼굴에 있는 칼자국을 보고도 이러나? 하긴 내 모양새가 조금 그렇기는 하지.
“근데, 아저씬 이 아가씨랑 무슨 관계요?”
미련이 남았는지 두 놈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지만 못 들은 척 술잔을 들고 아라와 잔을 부딪는데 정안의 표정이 매우 불안해 보인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먹고 마셔. 괜히 체할라.”
“아으! 이봐요들. 안 가면 경찰 불러요”
“아, 부르쇼. 우리가 무슨 일 저질렀나? 그냥 몇 마디 물어본 거뿐인데.”
“그려! 자세히 보니까 승아 씨 맞네. 에이, 누굴 속이려고. 우리 팬이요. 팬. 승아 씨 팬이란 말요”
“아, 시바! 글쎄 난, 승아란 여자가 아니라고요.”
한 녀석, 바로 스포츠머리에 일구라 불렸던 놈이 털썩, 내 옆에 앉으며 아라를 빤히 쳐다본다. 분위기를 망친 대가로 기어코 발끈한 아라 입에서, 쌍시옷이 나와버렸다.
“아이고! 이쁜 얼굴에, 입은 더럽네. 잉! 띠발, 아니면 그만이지.”
녀석이 막 술잔을 들어 올리는 내 팔꿈치를 의도적으로 툭 친다.
술은 왈칵 쏟아졌고, 이때 카운터 쪽에 있던 주인이 다가와 정중하게 녀석들을 타이른다.
그러나 놈들은 들은 척도 않았고, 점입가경으로 턱하니 아라 앞에 술잔까지 내민다.
“이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잔 쳐보쇼, 우리 합석합니다. 어떻소? 아저씨!”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게, 나보다 먼저 아라가 일을 벌일 것 같았다. 그제야 아라 모르게 조용히, 옆에 앉은 일구라는 녀석에게 밖에서 보자고 제의했다.
녀석이 히죽 웃으며 일행에게 눈짓한다. 호구 하나 걸렸으니 쪽 내고 와서 깔치는 적당한 곳에 데려가 돌리는 게 어떠냐 하는 눈빛이다.
분명 후진이나 멍멍이들 꼬봉들이다. 학교 다닐 때 다이다이나 맞상대깨나 해 본 치들.
“어, 어떻게 했어요?”
순식간의 일이라 미쳐 따라 나오지 못하고 가게 안에 있었던 아라.
불안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멋쩍게 씩 웃으며 나는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앞 테이블 술값을 내가 내기로 하고 몇 푼 집어줘서 돌려보냈어. 먹자!”
“뭐야? 어떻게 했다고?”
“왜 그래? 다른 사람들 듣는구먼. 목소리 낮춰!”
“경찰 부르면 되잖아, 아휴. 내가 미쳐!”
다음에 생략된 말이 뭔지 나는 안다. 병신!
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막 나온 감성돔 스시를 초장에 찍어 한 입 우물우물 씹었다.
입안에 음식물이 있으니 대답을 안 해도 뭐라 그러지는 않을 거다.
거푸 서너 번을 그렇게 먹으며 오가피주와 소주를 번갈아 술잔에 채웠다.
“먹어 봐! 쫀득쫀득한 게 엄청 싱싱하네. 한 쌈 만들어 먹여줄까?”
“됐어, 안 먹을래! 회랑 술이 목으로 넘어가나. 그런 개 창피를 당하고도.”
뒷부분은 혼잣말처럼 지껄였으나 내 귀에는 다 들렸다.
아라는 술만 서너 잔 홀짝거렸다.
싱싱한 활어회 한 접시를 혼자 다 먹어버린 셈이다.
숙녀 앞에서 처음으로 끅 트림까지 하고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대화의 소강상태를 보이며 해변을 천천히 걸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기분이 풀리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아라가 슬그머니 팔장을 껴온다.
찰박거리는 작은 파도 소리, 약간은 비릿하고 습한 짠 내음에 섞여 아라가 속삭였다.
“우리 그냥 호텔로 가요. 이쪽은 괜히 기분 나빠. 사람들도 별로 없고.”
미처 아라의 그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허공이 갈라지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아라의 잘록한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살짝 비틀며, 아라 상체가 비스듬히 기울어지게 오른발을 내딛고, 좌측 어깨를 빠르게 접어 한 박자를 띄웠다.
상당히 깔끔하고 정확한 타격이 나의 대정골을 노리고 장작을 패듯 휘둘러져 온 것이었다.
“캭! 오빠!”
날카로운 소프라노 음색이 밤하늘을 울렸다. 분명 퍽!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신음을 터뜨리며 내가 쓰러져야 하는데.
“눈 감아! 저 자식들 모래 뿌릴지 몰라”
아슬아슬하게 허공의 바람을 가른 각목이 내 어깨를 비껴갔다.
예상대로다.
녀석들은 수적으로 불어나 있었다. 모두 6명. 그중 맨손이 넷, 두 녀석의 손아귀 사이에는 흐린 어둠 속에서도 반짝 빛나는 날카로움이 보였다.
급박한 외침을 듣고 눈을 질끈 감은 아라, 모래는 내가 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두 걸음을 전진했다.
아라를 버려두고 그들을 칠 수도, 그렇다고 멍청하게 방어만 할 수도 없었다.
각목을 휘둘렀던 놈과 좌우에 있던 녀석들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천천히 무릎을 접는다.
“저 새끼! 보통 놈이 아냐, 한꺼번에 쳐!”
“일구야! 창피하잖아...겨우 한 놈한테 다구리라니...”
방심은 금물, 다시 두 걸음을 전진하면서 내 몸이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아라의 동체가 가벼워 운신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질질 다시 두어 걸음 끌려온 그녀, 눈을 꼭 감고 있다.
우리 아라 착해요!!
“봐! 새꺄. 억!”
“끄으윽!! 컥..!”
뒤이어 튀어나오는 다급성과 함께 호흡이 막히는 신음.
남은 녀석의 숫자는 둘에서 하나 더, 몸을 구부린 내 손에는 한 움큼의 모래가 다시 잡힌다.
동전도 무기가 되지만, 보드라운 모래가 치명적인 무기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거다. 요놈들아. 히힛!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바닥으로 구르는 녀석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소릴 쳤다.
장차 내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꿈에도 모른다.
외곽 고속도로의 톨게이트를 빠져 시내로 진입하는 초입에 규모가 작은 간이휴게소가 있다.
최근 들어 일을 쉬고 있는 아라는 미리 왔었는지, 애마의 보닛 열기가 완전히 식어 있었다.
은발이 드문드문 섞인 가발만 벗고 운전대를 잡자, 왕 비서는 이내 아라의 애마를 몰고 휴게소에서 사라져갔다. 혹시나 모를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는 방법이다.
긴 머리를 말아 올려 하얀 뜨개 소재의 모자를 쓰고, 커다란 잠자리 안경으로 조막만 한 얼굴을 반이나 가린 아라는 자연스럽게 내 차로 다가왔다.
“피곤해 보인다. 운전 하느라 힘들었구나. 많이 기다렸니?”
“조금. 시간 넉넉해 천천히 왔어요. 민낯이니 창백해 보여서 그런가? 요즘 늘어지게 쉬는데...”
“봐봐! 선글라스 벗고.”
처음이 아니라 내가 뭘 하려는지 아라는 알고 있다. 간단하게 서너 군데 특수한 화장을 하면 얼굴이 감쪽같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변장술이다.
“히~! 역시 오라버닌 신비해. 오늘은 싸가지 년 오승아 닮았잖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안전띠를 채워 차를 출발시켰다.
“저녁이면 아직 바닷바람이 찰 텐데, 횟집에서 식사나 할까?”
“바다 보고 싶어! 해변 카페에서 술도 마시고 싶고, 나이트에 가서 춤도 추고, 하고 싶은 게 많아.”
“술은 안돼. 오빠, 운전해야 하잖아”
“그럼 호텔에서 룸서비스 시키면 돼. 받아 보고 난 뒤에.”
“호텔이라니? 나, 청죽도 들어갈 텐데, 아라는 이따 왕 비서 차 태워서 보내고.”
“싫어! 오늘은 꼭 자고 갈 거야. 다음 달부터 영화랑 드라마 겹치기 촬영 들어가면 시간 정말 없단 말야”
“하여간 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분간이 안 가요. 넌, 오빠랑 비디오 찍은 거 무섭지도 않아?”
“그게 뭐 어때서. 그거 뿌리면 난 더 좋지 뭐. 이것저것 다 때려치우고 죽자 살자 한사람에게만 매달리면 되니까.”
사람들이 들끓지 않는 조용한 해변도 운치가 있지만 그런 곳은 숙박시설이 빈약한 곳이 많다.
남의 눈에 띌 위험은 있지만 때론 과감하게 유명 관광지를 찾아 거리낌 없이 노는 것도 좋다.
스릴이 있다. 하긴 누가 알아봐도 긴가민가할 테지만 말이다.
아직 남자 맛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아라. 나를 만나면 막무가내로 잠을 같이 자자니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안 선다.
“아무튼 어영부영 승이 떼서 다른 차에 태울 생각하지 마. 저번 때처럼 신고해 버릴 테니까...”
연기자의 직업의식이랄까? 변장을 조금 시켰더니 아라는 대번에 자신을 승아라고 한다. 미리 실수를 방지한다는 예방 차원에서는 훌륭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큭! 신고? 말도 마라!
오월비상이란 옛말이 하나도 안 틀린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그 말 말이다.
아라 고집이 장난 아니다.
그날도 자고 가자는 걸 억지로 달래, 다른 차를 오게 해 태웠더니, 떡하니 112 상황실에다 전화를 걸어서는 조폭들한테 납치 중이라고.
고속도로 순찰대까지 출동하고 장난 아니었다.
아라는 그 얄팍한 어깨까지 으쓱하며 의기양양해라 한다.
그렇다면 뭐, 운전하는 나를 위해 서비스 차원으로 바지 지퍼라도 좀 내려주면 좋으련만, 또 그런 건 순진한 건지 숙맥인지 해줄 줄도 모른다.
윤아나 지민인 차에만 올라탔다 하면, 물고 빨고 심지어 카섹스라면 환장을 하는데 말이다.
민락의 해 오름은 먼 친척 조카뻘되는 운서가 주인으로 있는 꽤 괜찮은 활어회 전문 식당이다
물론 운서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그만큼 나는 고독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여럿 아니, 숱한 사람들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보안은 철저하다.
주말이 아닌 탓에 가게 안은 한산하진 않았지만, 테이블 손님들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눈에 번쩍 띄는 쭉쭉 빵빵 늘씬한 미녀와 얼굴에 칼자국이 쭉 난 사내가 들어서니, 저마다 한 번씩은 쳐다본다. 고개를 갸웃하는 치들도 있다.
그들 중 이십 대 젊은 남자 네 명이 생선회에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 앞이 바다를 향한 창가의 자리라 그쪽으로 갔다.
감성돔과 오가피주를 시키고 따로 소주도 한 병 추가해 주문했다.
술을 두 병이나 주문하자 아라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간다. 적당히 술에 취하면 대리를 부르든 택시를 이용하든 멀지 않은 해운대 호텔로 가야 할 테니까.
하지만 내 속셈은 그게 아니었다. 술 취했다는 핑계로 왕 비서나 청죽도 성재를 불러 운전을 시킬 수 있는 것이다. 동상이몽이었다.
준비 음식이 나오고 막 잔을 채우는데 앞 테이블에 앉아있던 스포츠머리의 청년이 한 손에 메모지를 덜렁거리며 우리 쪽으로 온다.
기가 찰 노릇이다. 내 변장술이 이렇게 뛰어나단 말인가? 아라도 어이가 없는지, 한참 멍하니 가타부타 대답이 없다.
그러자 녀석들은 무언이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우르르 이쪽으로 몰려왔다. 두 녀석은 잽싸게 폰카까지 들이대며 셔터를 누르려고 폼을 잡았다
“어허! 오승아가 누구야? 그리고 함부로 카메라 들이대면 초상권 침해로 콩밥 먹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어느 지방인지도 모를 사투리를 섞어 주절댔으나, 보아하니 쉽게 물러갈 녀석들이 아니었다. 폼새가 조금 바닥 물을 먹은 놈들 같았다.
“에헤이, 아재는 가만있으쇼! 매니전가 본데, 우린 그냥 승아 씨 사인 한 장이면 되여라”
“글쎄, 오승아가 누군지 모르지만, 번지를 잘못 찾았소, 술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가쇼.”
“그런 말 많이 들어요. 하지만 오빠 말대로 나 진짜 오승아 아니니까 가세요.”
아라가 마지 못해 한마디 거들고 나서자 녀석들은 저들끼리 뭐라고 쑥덕거리는게 들린다.
“하긴 뭐. 오승아가 이런 데 와서 이 시간에 술 마시려구.”
“아냐! 맞아. 일부러 연막 치는 거야. 괜히 인터넷에 뜨기라도 해봐. 난리가 나재...”
“일구 말도 맞고, 춘식이 말도 맞다. 진짜 오승아라면 저런 좀생이를 데리고 다니겠어? 한 번 움직이면 경호원이 몇 명씩 쭉 들러붙던데. 쪽은 죽인다!”
자식들, 얼굴에 있는 칼자국을 보고도 이러나? 하긴 내 모양새가 조금 그렇기는 하지.
“근데, 아저씬 이 아가씨랑 무슨 관계요?”
미련이 남았는지 두 놈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지만 못 들은 척 술잔을 들고 아라와 잔을 부딪는데 정안의 표정이 매우 불안해 보인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말고 먹고 마셔. 괜히 체할라.”
“아으! 이봐요들. 안 가면 경찰 불러요”
“아, 부르쇼. 우리가 무슨 일 저질렀나? 그냥 몇 마디 물어본 거뿐인데.”
“그려! 자세히 보니까 승아 씨 맞네. 에이, 누굴 속이려고. 우리 팬이요. 팬. 승아 씨 팬이란 말요”
“아, 시바! 글쎄 난, 승아란 여자가 아니라고요.”
한 녀석, 바로 스포츠머리에 일구라 불렸던 놈이 털썩, 내 옆에 앉으며 아라를 빤히 쳐다본다. 분위기를 망친 대가로 기어코 발끈한 아라 입에서, 쌍시옷이 나와버렸다.
“아이고! 이쁜 얼굴에, 입은 더럽네. 잉! 띠발, 아니면 그만이지.”
녀석이 막 술잔을 들어 올리는 내 팔꿈치를 의도적으로 툭 친다.
술은 왈칵 쏟아졌고, 이때 카운터 쪽에 있던 주인이 다가와 정중하게 녀석들을 타이른다.
그러나 놈들은 들은 척도 않았고, 점입가경으로 턱하니 아라 앞에 술잔까지 내민다.
“이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잔 쳐보쇼, 우리 합석합니다. 어떻소? 아저씨!”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게, 나보다 먼저 아라가 일을 벌일 것 같았다. 그제야 아라 모르게 조용히, 옆에 앉은 일구라는 녀석에게 밖에서 보자고 제의했다.
녀석이 히죽 웃으며 일행에게 눈짓한다. 호구 하나 걸렸으니 쪽 내고 와서 깔치는 적당한 곳에 데려가 돌리는 게 어떠냐 하는 눈빛이다.
분명 후진이나 멍멍이들 꼬봉들이다. 학교 다닐 때 다이다이나 맞상대깨나 해 본 치들.
“어, 어떻게 했어요?”
순식간의 일이라 미쳐 따라 나오지 못하고 가게 안에 있었던 아라.
불안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멋쩍게 씩 웃으며 나는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앞 테이블 술값을 내가 내기로 하고 몇 푼 집어줘서 돌려보냈어. 먹자!”
“뭐야? 어떻게 했다고?”
“왜 그래? 다른 사람들 듣는구먼. 목소리 낮춰!”
“경찰 부르면 되잖아, 아휴. 내가 미쳐!”
다음에 생략된 말이 뭔지 나는 안다. 병신!
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막 나온 감성돔 스시를 초장에 찍어 한 입 우물우물 씹었다.
입안에 음식물이 있으니 대답을 안 해도 뭐라 그러지는 않을 거다.
거푸 서너 번을 그렇게 먹으며 오가피주와 소주를 번갈아 술잔에 채웠다.
“먹어 봐! 쫀득쫀득한 게 엄청 싱싱하네. 한 쌈 만들어 먹여줄까?”
“됐어, 안 먹을래! 회랑 술이 목으로 넘어가나. 그런 개 창피를 당하고도.”
뒷부분은 혼잣말처럼 지껄였으나 내 귀에는 다 들렸다.
아라는 술만 서너 잔 홀짝거렸다.
싱싱한 활어회 한 접시를 혼자 다 먹어버린 셈이다.
숙녀 앞에서 처음으로 끅 트림까지 하고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대화의 소강상태를 보이며 해변을 천천히 걸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기분이 풀리고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아라가 슬그머니 팔장을 껴온다.
찰박거리는 작은 파도 소리, 약간은 비릿하고 습한 짠 내음에 섞여 아라가 속삭였다.
“우리 그냥 호텔로 가요. 이쪽은 괜히 기분 나빠. 사람들도 별로 없고.”
미처 아라의 그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허공이 갈라지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아라의 잘록한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살짝 비틀며, 아라 상체가 비스듬히 기울어지게 오른발을 내딛고, 좌측 어깨를 빠르게 접어 한 박자를 띄웠다.
상당히 깔끔하고 정확한 타격이 나의 대정골을 노리고 장작을 패듯 휘둘러져 온 것이었다.
“캭! 오빠!”
날카로운 소프라노 음색이 밤하늘을 울렸다. 분명 퍽!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신음을 터뜨리며 내가 쓰러져야 하는데.
“눈 감아! 저 자식들 모래 뿌릴지 몰라”
아슬아슬하게 허공의 바람을 가른 각목이 내 어깨를 비껴갔다.
예상대로다.
녀석들은 수적으로 불어나 있었다. 모두 6명. 그중 맨손이 넷, 두 녀석의 손아귀 사이에는 흐린 어둠 속에서도 반짝 빛나는 날카로움이 보였다.
급박한 외침을 듣고 눈을 질끈 감은 아라, 모래는 내가 뿌렸다. 그리고 그 순간 두 걸음을 전진했다.
아라를 버려두고 그들을 칠 수도, 그렇다고 멍청하게 방어만 할 수도 없었다.
각목을 휘둘렀던 놈과 좌우에 있던 녀석들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천천히 무릎을 접는다.
“저 새끼! 보통 놈이 아냐, 한꺼번에 쳐!”
“일구야! 창피하잖아...겨우 한 놈한테 다구리라니...”
방심은 금물, 다시 두 걸음을 전진하면서 내 몸이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아라의 동체가 가벼워 운신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질질 다시 두어 걸음 끌려온 그녀, 눈을 꼭 감고 있다.
우리 아라 착해요!!
“봐! 새꺄. 억!”
“끄으윽!! 컥..!”
뒤이어 튀어나오는 다급성과 함께 호흡이 막히는 신음.
남은 녀석의 숫자는 둘에서 하나 더, 몸을 구부린 내 손에는 한 움큼의 모래가 다시 잡힌다.
동전도 무기가 되지만, 보드라운 모래가 치명적인 무기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거다. 요놈들아. 히힛!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바닥으로 구르는 녀석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소릴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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