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본성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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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는 공상하는 취미가 있었던 것 같다. 학생 시절에는 밤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 사이에 놓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는, 동화같이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잠이 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외국의 어느 유명한 시인이 편지왕래 만으로 영혼의 교감을 통한 사랑을 나누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참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20대가 되어서도 동화처럼 순수하고 플라토닉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성인이 된 여자로서 내 몸의 아름다움에도 관심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약간 통통한 편이었던 나는 대학생이 된 이후 다이어트를 조금 했더니 몰라보게 이뻐졌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20대 초반에 다이어트로 3~4키로 뺀 체중이 20대 중반이 되면서는 굳이 힘들여 운동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는데, 원래부터 가슴과 엉덩이엔 살집이 있는데 비해 팔목과 발목, 허리뼈는 얇은 편이었기에 다이어트를 했음에도 가슴과 엉덩이살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하복부의 뱃살만 많이 빠져 한국여자로서는 보기드문 글래머러스한 체형이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보는 사람마다 내 몸매가 잘 빠졌다고 칭찬하곤 했는데 처음엔 그게 익숙치 않았기도 했거니와 , 조금만 붙는 옷을 입어도 내가 입으면 몸매 때문인지 은근히 야해보였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자꾸 내 몸매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쑥쓰럽고 달갑지만은 않아 평소엔 헐렁헐렁한 옷을 위주로 입어 몸매를 감추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또 나는 내 몸매가 고스란히 들어나는 미니스커트와 가슴이 깊히 파인 브이넥 원피스 같은 옷들도 구입해서 옷장 안에 감춰두고 가끔 심심하면 꺼내입으며 거울 앞에서 내 몸매를 감상하곤 했다.
그런데 참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말하길, 남자들은 나처럼 육감적인 몸매의 여자를 좋아한다고들 하던데, 내 얼굴의 첫인상이 도도하고 이지적이며 차가워보이는 이미지여서 그런지 그동안 나에게 접근해오는 남자들 중에는 처음부터 나를 만만히 보고 육체적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접근하는 남자들은 별로 없었다. 물론 남자들의 속마음이야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내게 함부로 대하거나 치근덕거리는 남자들은 없었단 뜻이다.
플라토닉한 사랑을 꿈꾸던 나에게 그 점은 어떻게 보면 참 다행이라 생각되었지만서도, 또 한편으로는 왠지 사람들은 섹시하고 도도하게 생긴 여자들을 말로만 매력이 있다그러지 사실 남자들이 선뜻 마음을 주기엔 부담되는 여자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또 주위의 연애하는 남녀들을 보면, 왠지 작고 아담한, 내가 보기엔 비실비실한 어린 아이같은 체형의 여자에게 사족을 못 쓰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들로 평상시의 나는 몸매를 적당히 감추고 깔끔하고 단정해보이도록 옷을 입기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화장을 할 때에도 치켜올라간 눈썹을 다듬고 다듬어서 정숙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하려 애쓰곤 했다. 물론 이제와서 생각하면 정말 우스운 발버둥이었다. 아무리 감추려해도 사람의 본래 생김새와 천성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간단한 진리를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남자, 류지훈은 약 1년전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며 나를 여왕님 모시듯 하여, 나는 그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우리의 연애는 처음 시작되었었다. 그때...우리의 관계가 지금처럼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와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그를 만나기 전, 그러니까 약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때는 바야흐로 2008년, 미국에서의 대학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국내에서 명문 K대 심리학과를 잘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미국의 미대에 편입한지 3년만에 무사히 졸업을 하긴 했지만 취직할 걱정이 막막하여 한국에 돌아오면서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때마침, 운이 좋게도 한국에서는 영어로 미술을 가르치는 아동미술학원이 상류층 학부모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을 타고 있었다. 원생들이 대거 몰리자 대형 프렌차이즈 영어미술학원에서는 영어와 미술을 동시에 잘하는 학벌 좋은 강사가 몹시 급하게 되었고. 덕분에 유학파였던 나는 무경력임에도 별다른 노력 없이 대형 프렌차이즈 영어미술학원의 전임강사로 단번에 취직이 되었다.
그렇게 취직걱정을 한결 덜고 나자 마음의 여유도 조금 생기고, 아동미술학원에서 딱히 야근을 하는 일도 없어 시간적 여유도 생겼다.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7시쯤이 되었다. 저녁의 남는 시간에 책을 읽기도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항상 빈 시간이 많이 생겼다. 한국에 친구가 별로 없어서 늘 만나던 고등학교 친구들을 또 불러내 만나는 것도 한두번이었다. 나는 한창 이쁘게 꾸미고 사랑받고 싶은 20대 중반의 여자였고,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 당시의 나는 20대 중반임에도 순수한 사랑을 꿈꾸던 철없는 여자였다. 아무 조건 없이 그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고 정을 줄 수 있는 남자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항상 내가 바라는 대로만은 되지 않는 법이다. 내가 아무 조건 없이 애정을 주면 상대방도 그런 내 마음에 감동해서 나에게 더 잘하겠지 싶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실되게 보여주면 되겠거니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남자는,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해주는 것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다 저마다 그릇의 크기가 있었다. 그릇이 소주잔만한 남자는 아무리 사랑을 양동이채 들이부어도 소주잔만큼만 채워지고, 나에게 돌아오는 것도 딱 고만큼밖에 안되더라. 그것은 물질적인 것을 주고받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의사소통의 수준차이나 성격에 따른 문제도 있었다. 남자가 한번 자격지심을 느끼게 되면 내 확실한 의사표현은 명쾌함이 아니라 오만함으로 비춰지고, 평소에 무심코 쓰는 표현들은 지적인 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저 나 혼자만의 잘난척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내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이해심을 키우면 키울수록 상대 남자는 더 많은 이해심을 바랬다. 내가 남자의 자유를 존중하고 믿어주면, 상대방은 나를 되려 쉬운 여자라 여기고 믿음과 신뢰 대신 배신을 주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내가 가진 ‘이상’을 감당하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사랑이란 말은 참으로 헛되게 느껴졌고 헌신이란 말은 말 그대로 헌신짝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지치고, 또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몇 개월이 채 안되게 사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가, 나를 작정하고 속이고 양다리를 걸쳤던 한 남자와의 연애를 마지막으로, 나는 ‘조건’을 보고 ‘밀당’을 하는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남자를 대할 때, 내가 줄 것보다 받을 게 얼마나 있는지를 먼저 염두에 두고 남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몸매에 대한 어필을 충분히 하면서도 절대 날 쉬이 여기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애인인 류지훈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었다.
지훈씨는 나보다 두 살이나 연하였음에도 신사적이고 품위가 있었다. 키 크고 선해 보이는 인상에 자신감이 충만했으며 동시에 겸손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기세였다. 그는 항상 퇴근 후 내가 일하는 곳까지 데릴러와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으며 매일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는 나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고 나는 작정하고 그걸 즐겼다. 그가 아무리 품위 있는 태도를 지녔어도, 그도 남자인 이상 내 몸에 매우 관심이 많다고 나는 확신했기 때문에, 그를 만날 때면 너무 수수한 옷 대신 카라가 있는 넉넉한 품의 실크 체크 블라우스에 미니스커트 등을 매치해 단정해보이면서도 몸매를 은근히 드러내는 옷들을 골라 입었다. 또 그러면서도 내가 그를 매우 신사적이고 매너 있는 남자로 여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나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스킨쉽에 있어서는 조심스럽게 대했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듯 했다. 이전의 연애에서 시간이 지나 정이 쌓이고 남자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수록 나를 쉽게 여기는 것을 누누이 겪어봤기에, 나는 그의 신중한 행동과 나를 대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지훈씨는 회사에서 주말 출장이 있다고 하여 오랜만에 혼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혼자 바람도 쐬고 쇼핑이나 할겸 해서 오랜만에 명동엘 갔는데 길거리 한복판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소연아!”
내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매우 낯익은 얼굴이었다.
“......동수?”
한동수, 그는 바로 내가 이전에 잠깐 사귀었던 애인 중 한명이었다. 당시에 그는 마땅한 계획도 없이 대학은 자퇴하였고 가진 것은 쥐뿔도 없었고 성격도 매우 이기적이었지만 한때 내가 뭐에 홀렸는지 매우 헌신적으로 사랑을 갖다바쳤던 남자였다. 돈이 없어서 매일 맥도날드 햄버거만 먹었어도, 무슨 내가 영화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마냥 꿋꿋히 헤쳐나가야할 사랑의 어려운 시련쯤으로 생각하며 애정을 갖다바쳤었던 것이다. 그땐 내가 왜 그랬을까? 새삼 생각하면 참 어이없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과거일 뿐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명동엔 왠일로 온거야?”
“으응, 오랜만에 쇼핑하려고 나왔지 뭐.”
“아아, 그렇구나...”
우리는 헤어진 후 몇 년만에 우연히 거리에서 다시 만나는, 과거 연인이었던 대부분의 남녀가 그렇듯 어딘지 어색하고 뻘줌한 느낌으로 길거리에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두 번 다시 찾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꼭꼭 숨겨놓았던 기억의 상자가 우연히 다시 펼쳐진 느낌이었다.
“얼굴이 참 좋아보인다. 요새 연애해?”
“응 뭐, 만나는 남자는 있지.”
“아...역시, 그렇구나.”
동수는 그러고보니 예전부터 거침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연애얘기를 물었고 나도 그에게 별로 특별한 감정이 남아있었던 것도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지훈씨의 얘기를 하였다. 오히려 한동수에게 그보다 훨씬 잘난 애인이 있다는 것을 은근 자랑하고픈 심산도 있었다. 나는 이야기 중에 내 현재의 애인이 대기업인 H기업 계열의 카드사에 다닌단 사실도 슬쩍 내비쳤다. 동수는 나와 사귈땐 참 자기 멋대로 굴더니 나와 헤어지고 난 뒤에는 계속 변변찮은 애인을 못 사귄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 동수의 말에, 이미 특별한 약속 없이 혼자 나온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거절을 하기가 뭐하여 그럼 식사만 같이 하기로 했다. 근처 닭갈비집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앉아서 다시 보니 많이 힘들었는지 예전보다 살은 조금 빠졌지만 다부지게 생긴 모습은 여전했다. 그는 내 근황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요새도 계속 그 학원 강사 일해?”
“응, 그렇지.”
“벌써 2년째지? 나랑 사귈 때 들어간지 얼마 안되었을 때니깐”
“아, 그러고보니 그렇네.”
“월급도 좀 올랐겠네?”
“응...그리고 사실 학원이 잘되어서 지점을 하나 더 늘릴 계획인데 지금 인테리어 공사도 거의 마무리 되가고 있어. 거기 공사가 다되면 실장급 강사를 우리 학원 강사들 중에서 채용할 생각인데 원장은 날 염두에 두고 있나봐.”
“휴, 그렇구나...정말 잘된 일이네??”
“월급은 많이 오르겠지 아마. 집에서 좀더 멀어지긴 하겠지만.”
그는 자신의 얘긴 별로 자세히 하지 않았는데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 듯했다. 아직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이 아르바이트 등으로 하루 용돈을 버는 모양이었다. 나와 사귈 당시에도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 나에게 늘 의지하였고 돈도 종종 빌렸던 터라 그럼 그렇지 싶으면서도, 막상 오랜만에 만났는데 기운 없이 쳐진 모습을 보자 그래도 한 때 정을 주었던 남자인지라 짠한 마음이 들었다. 동수는 그래도 나와 사귀면서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거나 하진 않았다. 그 속이야 돈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헤어질 무렵에도 끝까지 나만을 바라보던 남자였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격려하고 위로해주었다.
동수는 닭갈비가 익어가는 것을 물끄럼히 바라보다가 술 한잔만 하겠다며 참이슬을 한병 시키더니, 나한테는 묻지도 않고 소주잔 두 개를 점원한테 달래가지고 앞에다 놓고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잔을 한잔 금새 들이키더니 나에게도 한잔 하라며 권했다.
“아니야, 난 됐어. 집에 일찍 들어가봐야 하기도 하고. 나 잘 취하는거 알잖아.”
“에이, 그러지 말고 한잔만 해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네가 있으니까 걱정이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딱 한잔 한다고 별다른 일이야 있을까 싶어서 마지못한 척 잔을 입에다 댔다. 사실 이렇게 편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오랜만이라서 한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지훈씨와는 사귄지 일년이 다되어가는데도 함께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동수와 사귈 때는 직장을 다니던 내가 늘 데이트비용을 지불했고, 가끔가다 그가 알바한 돈으로 고기에 소주를 마셨다. 반면에 지훈씨는 이런데 날 데려오는 것조차 미안해할 지경이었다.
“휴, 소연이 넌 정말 좋은 남자 만날 줄 알았어. 내가 그때 비록 철이 없어서 너한테 잘 못했지만, 넌 참 좋은 여자였는데...내가 많이 미안했지,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후후, 그래...너가 나한테 잘 못한게 참 많긴 했지. 뭐, 괜찮아 이미 다 지난 얘긴데.”
“내가 진짜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널 잡았어야 했던건데, 내가 못된 놈이란걸 나도 알아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지금 뭘 어쩌자는게 아니라, 그냥 그때의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으응~~그래애~~~”
“지금 애인이 잘해주겠네? 나보다 훨씬 더 잘해주겠지??”
“으응...날 편하게 해주지...”
그래도 옛 애인이라고 내 지금의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많이 궁금한가보았다.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술을 한잔 원샷을 하고는 또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밤에도 나보다 더 잘해? 화끈하게 만족시켜줘??”
“에이~~ 왜 그런 걸 물어~~동수야, 너 많이 취했다, 그만 마셔~~”
“솔직히 말해봐~~ 박소연! 너 내가 별 볼일 없어도 사귀었던 이유가 뭐야??”
“이유라니~~새삼 그런 건 왜 물어보니, 다 지난 일인데~~”
“내가 맞춰봐? 소연아? 응?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 내가 매일 밤 죽여줬잖아~~”
“어휴~~ 동수야~~!그만해~~~”
술을 연거푸 마시며 동수가 이러쿵저러쿵 새삼 옛날 얘기를 꺼내자 나는 당황스러웠고, 그가 참 못나 보이면서도 이상하게도 그의 말에 딱히 뭐라고 부정할 말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는 낮에는 참 갖가지 일들로 다투었지만 밤이 되면 모든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아지경으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동수는 낮동안에 내게 어떻게 대해도 내가 자신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졌을만큼 밤마다 나를 그의 노예로 만들었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지훈씨와의 잠자리는 그런대로 만족할만 한 정도였지만, 이전의 경험에서 느꼈던 강렬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살짝 부족하긴 했다. 그러다가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며 황급히 머릿속의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소연아, 나...사실 요즘 네 생각 많이 했는데, 이렇게 우연히라도 만나니까 너무 반갑고 좋다.”
“으응, 나도 그러네. 참 세상 좁다.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몰랐어? 난 언젠가 만날거라고 생각했어. 계속 생각하고 있었으니깐. 왜, 노래가사에도 그러잖아.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되는~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동수는 예전 생각이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더 이상 영화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았다. 또다시 그런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이었다. 한잔만 더 하자는 동수의 제안을 애써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지훈씨였다.
“여보세요?”
“지훈씨 전화했었어요?”
“소연씨 보고싶어서 아까 전화했었죠~ 뭐하고 있었어요?”
“명동에서 쇼핑하느라고, 가방 안에 넣어두고 깜박했어요.”
“아아~ 그렇구나...소연씨, 나 주말출장이 좀 연장되어서 월요일 밤에나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안해서 어쩌죠?”
“괜찮아요~~일 때문인데 뭐. 나 신경쓰지 말고 일 열심히 해요.”
“그래도...너무 미안하네요. 월요일날 내가 맛있는 거 살게요. 먹고싶은 거 뭐든지 생각해둬요.”
“알겠어요. 나 이제 그만 씻을께요. 오랜만에 많이 걸었더니 피곤하다~”
“그래요, 소연씨 잘자고, 사랑해요!”
“지훈씨도 잘자요~~ 나도 사랑해요 지훈씨!”
전화를 끊고 욕조에 들어가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니 한주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아까 동수를 만날 때 잠시 떠올렸던 기억이 슬그머니 다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지금의 지훈씨에게 여러 면에서 만족하고 있고 구태여 나를 힘들게 했던 동수와는 더더욱 비교하고 싶지가 않았다. 사실 지훈씨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건, 그러니까 잠자리에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매우 신사적이고 깔끔한 매너를 보여주는 데에 나는 더욱 신뢰를 느끼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동수를 우연히 만났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잊어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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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대가 되어서도 동화처럼 순수하고 플라토닉한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성인이 된 여자로서 내 몸의 아름다움에도 관심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약간 통통한 편이었던 나는 대학생이 된 이후 다이어트를 조금 했더니 몰라보게 이뻐졌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20대 초반에 다이어트로 3~4키로 뺀 체중이 20대 중반이 되면서는 굳이 힘들여 운동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는데, 원래부터 가슴과 엉덩이엔 살집이 있는데 비해 팔목과 발목, 허리뼈는 얇은 편이었기에 다이어트를 했음에도 가슴과 엉덩이살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하복부의 뱃살만 많이 빠져 한국여자로서는 보기드문 글래머러스한 체형이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보는 사람마다 내 몸매가 잘 빠졌다고 칭찬하곤 했는데 처음엔 그게 익숙치 않았기도 했거니와 , 조금만 붙는 옷을 입어도 내가 입으면 몸매 때문인지 은근히 야해보였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자꾸 내 몸매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쑥쓰럽고 달갑지만은 않아 평소엔 헐렁헐렁한 옷을 위주로 입어 몸매를 감추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또 나는 내 몸매가 고스란히 들어나는 미니스커트와 가슴이 깊히 파인 브이넥 원피스 같은 옷들도 구입해서 옷장 안에 감춰두고 가끔 심심하면 꺼내입으며 거울 앞에서 내 몸매를 감상하곤 했다.
그런데 참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말하길, 남자들은 나처럼 육감적인 몸매의 여자를 좋아한다고들 하던데, 내 얼굴의 첫인상이 도도하고 이지적이며 차가워보이는 이미지여서 그런지 그동안 나에게 접근해오는 남자들 중에는 처음부터 나를 만만히 보고 육체적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접근하는 남자들은 별로 없었다. 물론 남자들의 속마음이야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내게 함부로 대하거나 치근덕거리는 남자들은 없었단 뜻이다.
플라토닉한 사랑을 꿈꾸던 나에게 그 점은 어떻게 보면 참 다행이라 생각되었지만서도, 또 한편으로는 왠지 사람들은 섹시하고 도도하게 생긴 여자들을 말로만 매력이 있다그러지 사실 남자들이 선뜻 마음을 주기엔 부담되는 여자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또 주위의 연애하는 남녀들을 보면, 왠지 작고 아담한, 내가 보기엔 비실비실한 어린 아이같은 체형의 여자에게 사족을 못 쓰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들로 평상시의 나는 몸매를 적당히 감추고 깔끔하고 단정해보이도록 옷을 입기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화장을 할 때에도 치켜올라간 눈썹을 다듬고 다듬어서 정숙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하려 애쓰곤 했다. 물론 이제와서 생각하면 정말 우스운 발버둥이었다. 아무리 감추려해도 사람의 본래 생김새와 천성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간단한 진리를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남자, 류지훈은 약 1년전 나에게 첫눈에 반했다며 나를 여왕님 모시듯 하여, 나는 그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우리의 연애는 처음 시작되었었다. 그때...우리의 관계가 지금처럼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와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그를 만나기 전, 그러니까 약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때는 바야흐로 2008년, 미국에서의 대학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국내에서 명문 K대 심리학과를 잘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미국의 미대에 편입한지 3년만에 무사히 졸업을 하긴 했지만 취직할 걱정이 막막하여 한국에 돌아오면서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때마침, 운이 좋게도 한국에서는 영어로 미술을 가르치는 아동미술학원이 상류층 학부모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을 타고 있었다. 원생들이 대거 몰리자 대형 프렌차이즈 영어미술학원에서는 영어와 미술을 동시에 잘하는 학벌 좋은 강사가 몹시 급하게 되었고. 덕분에 유학파였던 나는 무경력임에도 별다른 노력 없이 대형 프렌차이즈 영어미술학원의 전임강사로 단번에 취직이 되었다.
그렇게 취직걱정을 한결 덜고 나자 마음의 여유도 조금 생기고, 아동미술학원에서 딱히 야근을 하는 일도 없어 시간적 여유도 생겼다.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7시쯤이 되었다. 저녁의 남는 시간에 책을 읽기도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항상 빈 시간이 많이 생겼다. 한국에 친구가 별로 없어서 늘 만나던 고등학교 친구들을 또 불러내 만나는 것도 한두번이었다. 나는 한창 이쁘게 꾸미고 사랑받고 싶은 20대 중반의 여자였고, 외로움을 달래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 당시의 나는 20대 중반임에도 순수한 사랑을 꿈꾸던 철없는 여자였다. 아무 조건 없이 그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고 정을 줄 수 있는 남자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항상 내가 바라는 대로만은 되지 않는 법이다. 내가 아무 조건 없이 애정을 주면 상대방도 그런 내 마음에 감동해서 나에게 더 잘하겠지 싶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실되게 보여주면 되겠거니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남자는,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해주는 것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다 저마다 그릇의 크기가 있었다. 그릇이 소주잔만한 남자는 아무리 사랑을 양동이채 들이부어도 소주잔만큼만 채워지고, 나에게 돌아오는 것도 딱 고만큼밖에 안되더라. 그것은 물질적인 것을 주고받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의사소통의 수준차이나 성격에 따른 문제도 있었다. 남자가 한번 자격지심을 느끼게 되면 내 확실한 의사표현은 명쾌함이 아니라 오만함으로 비춰지고, 평소에 무심코 쓰는 표현들은 지적인 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저 나 혼자만의 잘난척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내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이해심을 키우면 키울수록 상대 남자는 더 많은 이해심을 바랬다. 내가 남자의 자유를 존중하고 믿어주면, 상대방은 나를 되려 쉬운 여자라 여기고 믿음과 신뢰 대신 배신을 주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내가 가진 ‘이상’을 감당하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사랑이란 말은 참으로 헛되게 느껴졌고 헌신이란 말은 말 그대로 헌신짝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에 지치고, 또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몇 개월이 채 안되게 사귀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가, 나를 작정하고 속이고 양다리를 걸쳤던 한 남자와의 연애를 마지막으로, 나는 ‘조건’을 보고 ‘밀당’을 하는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남자를 대할 때, 내가 줄 것보다 받을 게 얼마나 있는지를 먼저 염두에 두고 남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몸매에 대한 어필을 충분히 하면서도 절대 날 쉬이 여기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애인인 류지훈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었다.
지훈씨는 나보다 두 살이나 연하였음에도 신사적이고 품위가 있었다. 키 크고 선해 보이는 인상에 자신감이 충만했으며 동시에 겸손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기세였다. 그는 항상 퇴근 후 내가 일하는 곳까지 데릴러와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으며 매일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는 나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고 나는 작정하고 그걸 즐겼다. 그가 아무리 품위 있는 태도를 지녔어도, 그도 남자인 이상 내 몸에 매우 관심이 많다고 나는 확신했기 때문에, 그를 만날 때면 너무 수수한 옷 대신 카라가 있는 넉넉한 품의 실크 체크 블라우스에 미니스커트 등을 매치해 단정해보이면서도 몸매를 은근히 드러내는 옷들을 골라 입었다. 또 그러면서도 내가 그를 매우 신사적이고 매너 있는 남자로 여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나에게 매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스킨쉽에 있어서는 조심스럽게 대했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듯 했다. 이전의 연애에서 시간이 지나 정이 쌓이고 남자에게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수록 나를 쉽게 여기는 것을 누누이 겪어봤기에, 나는 그의 신중한 행동과 나를 대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매우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지훈씨는 회사에서 주말 출장이 있다고 하여 오랜만에 혼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혼자 바람도 쐬고 쇼핑이나 할겸 해서 오랜만에 명동엘 갔는데 길거리 한복판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소연아!”
내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매우 낯익은 얼굴이었다.
“......동수?”
한동수, 그는 바로 내가 이전에 잠깐 사귀었던 애인 중 한명이었다. 당시에 그는 마땅한 계획도 없이 대학은 자퇴하였고 가진 것은 쥐뿔도 없었고 성격도 매우 이기적이었지만 한때 내가 뭐에 홀렸는지 매우 헌신적으로 사랑을 갖다바쳤던 남자였다. 돈이 없어서 매일 맥도날드 햄버거만 먹었어도, 무슨 내가 영화의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마냥 꿋꿋히 헤쳐나가야할 사랑의 어려운 시련쯤으로 생각하며 애정을 갖다바쳤었던 것이다. 그땐 내가 왜 그랬을까? 새삼 생각하면 참 어이없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과거일 뿐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명동엔 왠일로 온거야?”
“으응, 오랜만에 쇼핑하려고 나왔지 뭐.”
“아아, 그렇구나...”
우리는 헤어진 후 몇 년만에 우연히 거리에서 다시 만나는, 과거 연인이었던 대부분의 남녀가 그렇듯 어딘지 어색하고 뻘줌한 느낌으로 길거리에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두 번 다시 찾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꼭꼭 숨겨놓았던 기억의 상자가 우연히 다시 펼쳐진 느낌이었다.
“얼굴이 참 좋아보인다. 요새 연애해?”
“응 뭐, 만나는 남자는 있지.”
“아...역시, 그렇구나.”
동수는 그러고보니 예전부터 거침이 없는 성격이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연애얘기를 물었고 나도 그에게 별로 특별한 감정이 남아있었던 것도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지훈씨의 얘기를 하였다. 오히려 한동수에게 그보다 훨씬 잘난 애인이 있다는 것을 은근 자랑하고픈 심산도 있었다. 나는 이야기 중에 내 현재의 애인이 대기업인 H기업 계열의 카드사에 다닌단 사실도 슬쩍 내비쳤다. 동수는 나와 사귈땐 참 자기 멋대로 굴더니 나와 헤어지고 난 뒤에는 계속 변변찮은 애인을 못 사귄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 동수의 말에, 이미 특별한 약속 없이 혼자 나온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거절을 하기가 뭐하여 그럼 식사만 같이 하기로 했다. 근처 닭갈비집 들어가서 주문을 하고 앉아서 다시 보니 많이 힘들었는지 예전보다 살은 조금 빠졌지만 다부지게 생긴 모습은 여전했다. 그는 내 근황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요새도 계속 그 학원 강사 일해?”
“응, 그렇지.”
“벌써 2년째지? 나랑 사귈 때 들어간지 얼마 안되었을 때니깐”
“아, 그러고보니 그렇네.”
“월급도 좀 올랐겠네?”
“응...그리고 사실 학원이 잘되어서 지점을 하나 더 늘릴 계획인데 지금 인테리어 공사도 거의 마무리 되가고 있어. 거기 공사가 다되면 실장급 강사를 우리 학원 강사들 중에서 채용할 생각인데 원장은 날 염두에 두고 있나봐.”
“휴, 그렇구나...정말 잘된 일이네??”
“월급은 많이 오르겠지 아마. 집에서 좀더 멀어지긴 하겠지만.”
그는 자신의 얘긴 별로 자세히 하지 않았는데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닌 듯했다. 아직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이 아르바이트 등으로 하루 용돈을 버는 모양이었다. 나와 사귈 당시에도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 나에게 늘 의지하였고 돈도 종종 빌렸던 터라 그럼 그렇지 싶으면서도, 막상 오랜만에 만났는데 기운 없이 쳐진 모습을 보자 그래도 한 때 정을 주었던 남자인지라 짠한 마음이 들었다. 동수는 그래도 나와 사귀면서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거나 하진 않았다. 그 속이야 돈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헤어질 무렵에도 끝까지 나만을 바라보던 남자였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격려하고 위로해주었다.
동수는 닭갈비가 익어가는 것을 물끄럼히 바라보다가 술 한잔만 하겠다며 참이슬을 한병 시키더니, 나한테는 묻지도 않고 소주잔 두 개를 점원한테 달래가지고 앞에다 놓고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잔을 한잔 금새 들이키더니 나에게도 한잔 하라며 권했다.
“아니야, 난 됐어. 집에 일찍 들어가봐야 하기도 하고. 나 잘 취하는거 알잖아.”
“에이, 그러지 말고 한잔만 해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네가 있으니까 걱정이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딱 한잔 한다고 별다른 일이야 있을까 싶어서 마지못한 척 잔을 입에다 댔다. 사실 이렇게 편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오랜만이라서 한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지훈씨와는 사귄지 일년이 다되어가는데도 함께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동수와 사귈 때는 직장을 다니던 내가 늘 데이트비용을 지불했고, 가끔가다 그가 알바한 돈으로 고기에 소주를 마셨다. 반면에 지훈씨는 이런데 날 데려오는 것조차 미안해할 지경이었다.
“휴, 소연이 넌 정말 좋은 남자 만날 줄 알았어. 내가 그때 비록 철이 없어서 너한테 잘 못했지만, 넌 참 좋은 여자였는데...내가 많이 미안했지,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후후, 그래...너가 나한테 잘 못한게 참 많긴 했지. 뭐, 괜찮아 이미 다 지난 얘긴데.”
“내가 진짜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널 잡았어야 했던건데, 내가 못된 놈이란걸 나도 알아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지금 뭘 어쩌자는게 아니라, 그냥 그때의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해서 하는 말이야.”
“으응~~그래애~~~”
“지금 애인이 잘해주겠네? 나보다 훨씬 더 잘해주겠지??”
“으응...날 편하게 해주지...”
그래도 옛 애인이라고 내 지금의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많이 궁금한가보았다.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술을 한잔 원샷을 하고는 또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밤에도 나보다 더 잘해? 화끈하게 만족시켜줘??”
“에이~~ 왜 그런 걸 물어~~동수야, 너 많이 취했다, 그만 마셔~~”
“솔직히 말해봐~~ 박소연! 너 내가 별 볼일 없어도 사귀었던 이유가 뭐야??”
“이유라니~~새삼 그런 건 왜 물어보니, 다 지난 일인데~~”
“내가 맞춰봐? 소연아? 응?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 내가 매일 밤 죽여줬잖아~~”
“어휴~~ 동수야~~!그만해~~~”
술을 연거푸 마시며 동수가 이러쿵저러쿵 새삼 옛날 얘기를 꺼내자 나는 당황스러웠고, 그가 참 못나 보이면서도 이상하게도 그의 말에 딱히 뭐라고 부정할 말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리는 낮에는 참 갖가지 일들로 다투었지만 밤이 되면 모든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무아지경으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동수는 낮동안에 내게 어떻게 대해도 내가 자신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졌을만큼 밤마다 나를 그의 노예로 만들었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지훈씨와의 잠자리는 그런대로 만족할만 한 정도였지만, 이전의 경험에서 느꼈던 강렬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살짝 부족하긴 했다. 그러다가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며 황급히 머릿속의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소연아, 나...사실 요즘 네 생각 많이 했는데, 이렇게 우연히라도 만나니까 너무 반갑고 좋다.”
“으응, 나도 그러네. 참 세상 좁다.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몰랐어? 난 언젠가 만날거라고 생각했어. 계속 생각하고 있었으니깐. 왜, 노래가사에도 그러잖아.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되는~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동수는 예전 생각이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더 이상 영화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았다. 또다시 그런 감정에 휩쓸리는 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이었다. 한잔만 더 하자는 동수의 제안을 애써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지훈씨였다.
“여보세요?”
“지훈씨 전화했었어요?”
“소연씨 보고싶어서 아까 전화했었죠~ 뭐하고 있었어요?”
“명동에서 쇼핑하느라고, 가방 안에 넣어두고 깜박했어요.”
“아아~ 그렇구나...소연씨, 나 주말출장이 좀 연장되어서 월요일 밤에나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안해서 어쩌죠?”
“괜찮아요~~일 때문인데 뭐. 나 신경쓰지 말고 일 열심히 해요.”
“그래도...너무 미안하네요. 월요일날 내가 맛있는 거 살게요. 먹고싶은 거 뭐든지 생각해둬요.”
“알겠어요. 나 이제 그만 씻을께요. 오랜만에 많이 걸었더니 피곤하다~”
“그래요, 소연씨 잘자고, 사랑해요!”
“지훈씨도 잘자요~~ 나도 사랑해요 지훈씨!”
전화를 끊고 욕조에 들어가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니 한주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아까 동수를 만날 때 잠시 떠올렸던 기억이 슬그머니 다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지금의 지훈씨에게 여러 면에서 만족하고 있고 구태여 나를 힘들게 했던 동수와는 더더욱 비교하고 싶지가 않았다. 사실 지훈씨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건, 그러니까 잠자리에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매우 신사적이고 깔끔한 매너를 보여주는 데에 나는 더욱 신뢰를 느끼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동수를 우연히 만났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잊어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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