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마녀를 위한 밤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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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르르르르르르.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얼마남지않은 쇠구슬들이 파칭코 기계안으로 빨려들어간다. 나는 오른손에 힘을 주어 둥근 핸들을 조금씩 조절한다. 하나씩 위로 튕겨져 나가는 구슬들. 몇개는 한 복판의 구멍으로 흘러들어간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는 슬롯들. 하지만 대부분의 구슬들은 그리고 수없이 촘촘하게 박힌 핀 사이를 타고 아래로 쓸려내려가 버린다. 이렇게 수중에 남은 돈들이 오늘도 전부 구슬이 되어 기계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혀를 끌끌 차며 파칭코의 핸들을 손으로 탁 내리쳤다. 반 년전부터 파칭코는 내 삶의 일부, 아니 전부가 되었다. 이렇게 재밌는 게 한국에는 왜 없을까? 나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침 10시에 문을 여는 파칭코 가게 앞에 9시부터, 다른 파칭코 폐인들과 함께 줄을 서는 게 나의 일과다. 명목상의 본업이야 한국에서 일본대학으로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지만 이제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파칭코 가게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훨씬 더 많다.
문제는 승률이었다. 가끔은 따는 날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확률로 돈을 잃고 있었고, 잃은 돈을 한 방에 만회하겠다고 생활비까지 파칭코에 쓸어 넣으면서 난 이미 석달치 집세와 먹고 살 돈을 다 날려버리고 말았다.
“김민수, 너 이 자식 도대체 일본에서 공부는 안하고 뭐하고 사는 거야!”
몇 달전에도 파칭코로 돈을 다 날리고 집에 돈 좀 부쳐달라고 전화했다가 아버지에게 그야말로 파죽이 되도록 욕을 얻어먹은 적이 있다. 그 짓을 또 당할 생각하니 머리 끝이 쭈뼛거리기 시작한다. 미칠듯한 굉음 속에서 슬롯이 돌아가는 걸 보고 있을 때는 세상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는데 이렇게 돈을 다 날리고 파칭코 가게 앞에 앉아 캔커피나 홀짝 거리고 있으면, 세상 모든 근심은 다 나에게 쏟아지는 것 만 같았다.
며칠 후 난 작은 부동산 회사 사무실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몹시도 뚱뚱한 마미야 대리는 쌀쌀한 가을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흘리며, 책상에 앉아 서류파일을 뒤적였다.
“김상 사정은 잘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게 아니지. 오사카 시내 평균 집세라는게 있는데, 보증금도 사례금도 제로인데다 월세 2만엔 이하인데로 그것도 급하게 찾아달라니, 이런데는 원룸이 아니라 창고를 찾아도 안나와요.”
마미야 대리는 내가 작년에 오사카에 유학왔을 때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안내해준 부동산 회사 직원이었다.
“마미야 대리님, 제가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제발 저 한번만 살려주신다고 생각하고, 딱 한번만 도와주세요.”
“내가 집주인이면 2만엔 받고 김상 재워주겠어. 그런데 난 중개업자라구. 지금 우리 회사에 그런 물건이 없어요. 2만엔 이하짜리가 아주 없는건 아냐. 있을 때도 있어. 그런데 그런 곳은 귀신 나올정도로 음침한데다 샤워도 없고 앞뒤 꽉막힌 데가 대부분이야. 일주일도 못살어.”
“귀신이 나와도 좋고, 천정이 뚫려 있어도 좋으니까 제발 한번만 더 찾아봐 줘요.”
지금 사는 집에 더 이상 집세를 못내게 된 나는 급한데로 싼 방으로 옮겨 가야만 했다. 마미야 대리 말대로 그런 집을 지금 갑자기 찾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절실한 문제였다. 하루라도 빨리 이사를 가지 않으면 밥을 굶든지 아버지에게 맞아 죽든지 둘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미야 대리는 똥그란 안경을 고쳐 쓰고선,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리고선 부지런히 파일을 넘겼다.
“그것 참… 아무리 찾아도 그런 데가 없다니깐….”
“아, 마미야 대리님 그 집 있잖아요. 난바 덴덴타운 뒤에 있는…”
아까부터 카운터 뒤에서 저와 마미야 대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 직원이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엉? 아… 그…. 뭐였더라….”
마미야 대리는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아 맞아 맞아. 그런 물건이 있긴 있었다.”
“거기 월세 얼만데요?”
“16000엔.”
“예!?”
난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사카에서, 그것도 번화가라는 난바에서 월세 16000엔짜리 방이라. 믿기질 않았다.
“안 믿기지? 그런데 그런 곳이 있긴 있어요. 지어진지 50년 넘었고 다다미방인데다 좀 허름해. 그러다보니, 젊은 사람들에겐 소개를 잘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아까부터 김상을 위한 리스트엔 넣지 않았었지.”
마미야 대리는 다른 파일을 가져와서 펼쳤다. 그 곳에는 낡은 목조 건물 사진이 붙어 있었다. 방안의 사진도 뭐라 말로하기 뭐할 정도로 눅눅하고 허름해 보였다.
“여기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난 사진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마미야 대리를 독촉했다. 마미야 대리는 손수건으로 연신 목덜미를 훔쳤다.
달그락 달그락.
열쇠를 쥔 마미야 대리의 손이 움직이자 삐그덕 하고 방문이 열렸다. 텁텁하고 눅눅한 공기와 함께 오래된 다다미 냄새, 거기에 섞여있는 곰팡이 냄새가 훅 하고 삐져나왔다. 난 무의식적으로 입근처를 가렸다. 방은 사진에서 봤던 것 보다는 한결 나았다. 사진에선 정말 허름하게 나왔는데 실제로 보니 그것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았다. 변기에 앉으면 문을 닫기 힘들 정도로 비좁은 화장실, 그리고 그 옆에 붙은 샤워부스. 결코 쾌적한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없는 것 보다는 백배 나았다. 창틀에 앉은 먼지는 닦으면 그만이었다. 다다미도 진공청소기 한번 대주고 물로 잘 닦으면 되고, 방안의 냄새야 페브리즈를 뿌리면 해결될 문제였다. 에어컨이 없다는게 흠이었지만, 가을 겨울을 나는데 에어컨이 당장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모든 고민이 끝났다. 이 집을 계약하는 것이다. 월세 16000엔이다. 난바에서 웬만한 원룸 월세는 6만엔을 넘는다. 뭘 더 생각하랴.
난 모든 서류에 도장 찍고 당장 지금 사는 곳에서 짐을 뺐다. 없는 살림이라 포장이사를 부를 수도 없어 술 한잔 사주고 친구 차를 빌려 짐을 날렀다. 그렇게 나의 난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감각기관중 가장 먼저 마비되는게 후각이라더니, 곰팡이 냄새, 오래된 다다미 냄새에는 금방 적응이 되었다. 여기 저기 방향제를 둔 덕분에 집에서 나는 냄새도 썩 나쁘지 않았다. 낡은 목조 건물이라 그런지, 밤이되면 가볍게 집이 흔들리곤 했다. 커다란 트레일러 트럭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흔들리는 집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집이 그런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집 여기 저기서 끼익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이 집에서 몇 달 잘 버티면 파칭코로 날린 생활비를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따위로 살거면 한국으로 당장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고함소리를 듣지 않아도 이 고난의 행군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끼기기기기긱.
그 날 따라 집 여기 저기서 끽끽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은 신경이 거슬렸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난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한번에 들이키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반듯이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천정에 그려진 작은 문양들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다. 마치 서양 사람들이 양 한마리, 양 두마리, 양 세마리를 세듯이. 문양을 몇 개까지 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난 어느 시점에서인가 잠이 들었다. 분명히 잠이 들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디선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똑 똑 똑…. 몸은 잠에 빠져 있던 지라 움직이지 않았지만 의식만큼은 깨어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똑, 똑, 똑하고 규칙적으로 떨어지던 물소리가 갑자기 주르륵 하고 흐트러졌다. 그리고선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위로 떨어졌다. 몹시도 차가운 물방울이었다. 순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천정에서 비가 새는 모양이다. 싸구려 집에서 살다보니 드디어 이런 꼴을 당하는 구나. 나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조금 정신이 든 나는 가느다랗게 실눈을 떴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밖에서 들어오는 난바의 네온 불빛때문에 방 전체는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흐릿하게 보이던 방안이, 눈동자의 촛점이 맞으면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그 순간 난 숨이 턱 막혔다. 하얗고 늘씬한 다리, 그렇다 그것은 여자의 다리였다. 여자의 두 다리가 내 머리 위에 있었다. 그 늘씬한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미니스커트가 보였고 그 안쪽으로 두 다리가 이어지는 곳에는 하얀 팬티가 보였다. 똑…. 그 팬티의 앞섶에서 흘러 나온 물 한방울이 내 볼 위로 떨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이 여잔 또 누구고? 꿈인지 생시인지, 아니면 가위에 눌려 헛것이라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난 여전히 실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우직끈.
그 순간이었다. 뭔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길고 검은 것이 툭하고 아래로 쳐진다. 여자의 머리칼이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떨군 여자의 머리도 보였다. 난 화들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 소리와 함께 두 다리, 아니 여자의 몸 전체가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는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 머리는 천정으로 이어지는 끈에 묶여 있었다.
으아아악
난 소리를 지르며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자의 두 다리를 감싸 들어올렸다. 상황판단은 여전히 안되고 있었지만 이 여자가 목을 매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숨이 막히지 않게 다리를 들어올려야 겠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든 것은 그 생각 뿐이었다. 다리를 들어올리며 몸을 일으키느라 내 머리는 여자의 하늘하늘한 미니스커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코 앞에 여자의 팬티 앞섶이 있었다. 살짝 비쳐보이는 팬티의 앞섶으로 거뭇거뭇한 여자의 음모가 비쳐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난 여자의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때 여자의 팬티 앞섶이 조금씩 움찔거리는것 같더니 그곳에서 주르륵하고 물이 떨어져 내렸다. 몹시도 차가운 물이. 그러나 냄새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오줌이었다. 오줌은 여자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아랫쪽으로 흘러내려갔다. 그녀의 난 스커트 안쪽에서 머리를 빼 위를 쳐다 보았다. 긴 머리의 여자의 고개는 완전히 오른 쪽으로 꺾여 있었다.
으아아악
난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 곳은 다름 아닌 내 방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책상위에 놓인 책, 이불, 걸려 있던 옷들. 여기는 틀림없는 내 방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누구인가? 난데없이 남의 방에서 목을 매달고 있는 이 여자는? 난 그 여자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그때 또다시 윗쪽에서 우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꺾이는 듯한 몹시도 기분 나쁜 소리였다. 그러더니 힘없이 꺾여 있던 여자의 머리가 천천히 들어올려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럴 때마다 뚝 뚜둑하는 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악
난 또 다시 소리를 내 질렀다.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새하얀 얼굴에 기분나쁠 정도로 짚은 속눈썹 사이로 휑하게 뚫린 검은 눈이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여자의 두 다리를 감아쥐고 있던 내 두 팔이 덜덜덜 떨려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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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얼마남지않은 쇠구슬들이 파칭코 기계안으로 빨려들어간다. 나는 오른손에 힘을 주어 둥근 핸들을 조금씩 조절한다. 하나씩 위로 튕겨져 나가는 구슬들. 몇개는 한 복판의 구멍으로 흘러들어간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는 슬롯들. 하지만 대부분의 구슬들은 그리고 수없이 촘촘하게 박힌 핀 사이를 타고 아래로 쓸려내려가 버린다. 이렇게 수중에 남은 돈들이 오늘도 전부 구슬이 되어 기계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혀를 끌끌 차며 파칭코의 핸들을 손으로 탁 내리쳤다. 반 년전부터 파칭코는 내 삶의 일부, 아니 전부가 되었다. 이렇게 재밌는 게 한국에는 왜 없을까? 나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침 10시에 문을 여는 파칭코 가게 앞에 9시부터, 다른 파칭코 폐인들과 함께 줄을 서는 게 나의 일과다. 명목상의 본업이야 한국에서 일본대학으로 공부하러 온 유학생이지만 이제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파칭코 가게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훨씬 더 많다.
문제는 승률이었다. 가끔은 따는 날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확률로 돈을 잃고 있었고, 잃은 돈을 한 방에 만회하겠다고 생활비까지 파칭코에 쓸어 넣으면서 난 이미 석달치 집세와 먹고 살 돈을 다 날려버리고 말았다.
“김민수, 너 이 자식 도대체 일본에서 공부는 안하고 뭐하고 사는 거야!”
몇 달전에도 파칭코로 돈을 다 날리고 집에 돈 좀 부쳐달라고 전화했다가 아버지에게 그야말로 파죽이 되도록 욕을 얻어먹은 적이 있다. 그 짓을 또 당할 생각하니 머리 끝이 쭈뼛거리기 시작한다. 미칠듯한 굉음 속에서 슬롯이 돌아가는 걸 보고 있을 때는 세상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는데 이렇게 돈을 다 날리고 파칭코 가게 앞에 앉아 캔커피나 홀짝 거리고 있으면, 세상 모든 근심은 다 나에게 쏟아지는 것 만 같았다.
며칠 후 난 작은 부동산 회사 사무실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몹시도 뚱뚱한 마미야 대리는 쌀쌀한 가을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흘리며, 책상에 앉아 서류파일을 뒤적였다.
“김상 사정은 잘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게 아니지. 오사카 시내 평균 집세라는게 있는데, 보증금도 사례금도 제로인데다 월세 2만엔 이하인데로 그것도 급하게 찾아달라니, 이런데는 원룸이 아니라 창고를 찾아도 안나와요.”
마미야 대리는 내가 작년에 오사카에 유학왔을 때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안내해준 부동산 회사 직원이었다.
“마미야 대리님, 제가 오죽하면 이러겠습니까. 제발 저 한번만 살려주신다고 생각하고, 딱 한번만 도와주세요.”
“내가 집주인이면 2만엔 받고 김상 재워주겠어. 그런데 난 중개업자라구. 지금 우리 회사에 그런 물건이 없어요. 2만엔 이하짜리가 아주 없는건 아냐. 있을 때도 있어. 그런데 그런 곳은 귀신 나올정도로 음침한데다 샤워도 없고 앞뒤 꽉막힌 데가 대부분이야. 일주일도 못살어.”
“귀신이 나와도 좋고, 천정이 뚫려 있어도 좋으니까 제발 한번만 더 찾아봐 줘요.”
지금 사는 집에 더 이상 집세를 못내게 된 나는 급한데로 싼 방으로 옮겨 가야만 했다. 마미야 대리 말대로 그런 집을 지금 갑자기 찾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절실한 문제였다. 하루라도 빨리 이사를 가지 않으면 밥을 굶든지 아버지에게 맞아 죽든지 둘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미야 대리는 똥그란 안경을 고쳐 쓰고선,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리고선 부지런히 파일을 넘겼다.
“그것 참… 아무리 찾아도 그런 데가 없다니깐….”
“아, 마미야 대리님 그 집 있잖아요. 난바 덴덴타운 뒤에 있는…”
아까부터 카운터 뒤에서 저와 마미야 대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 직원이 넌지시 얘기를 꺼냈다.
“엉? 아… 그…. 뭐였더라….”
마미야 대리는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아 맞아 맞아. 그런 물건이 있긴 있었다.”
“거기 월세 얼만데요?”
“16000엔.”
“예!?”
난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사카에서, 그것도 번화가라는 난바에서 월세 16000엔짜리 방이라. 믿기질 않았다.
“안 믿기지? 그런데 그런 곳이 있긴 있어요. 지어진지 50년 넘었고 다다미방인데다 좀 허름해. 그러다보니, 젊은 사람들에겐 소개를 잘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아까부터 김상을 위한 리스트엔 넣지 않았었지.”
마미야 대리는 다른 파일을 가져와서 펼쳤다. 그 곳에는 낡은 목조 건물 사진이 붙어 있었다. 방안의 사진도 뭐라 말로하기 뭐할 정도로 눅눅하고 허름해 보였다.
“여기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난 사진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마미야 대리를 독촉했다. 마미야 대리는 손수건으로 연신 목덜미를 훔쳤다.
달그락 달그락.
열쇠를 쥔 마미야 대리의 손이 움직이자 삐그덕 하고 방문이 열렸다. 텁텁하고 눅눅한 공기와 함께 오래된 다다미 냄새, 거기에 섞여있는 곰팡이 냄새가 훅 하고 삐져나왔다. 난 무의식적으로 입근처를 가렸다. 방은 사진에서 봤던 것 보다는 한결 나았다. 사진에선 정말 허름하게 나왔는데 실제로 보니 그것보다는 훨씬 상태가 좋았다. 변기에 앉으면 문을 닫기 힘들 정도로 비좁은 화장실, 그리고 그 옆에 붙은 샤워부스. 결코 쾌적한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없는 것 보다는 백배 나았다. 창틀에 앉은 먼지는 닦으면 그만이었다. 다다미도 진공청소기 한번 대주고 물로 잘 닦으면 되고, 방안의 냄새야 페브리즈를 뿌리면 해결될 문제였다. 에어컨이 없다는게 흠이었지만, 가을 겨울을 나는데 에어컨이 당장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모든 고민이 끝났다. 이 집을 계약하는 것이다. 월세 16000엔이다. 난바에서 웬만한 원룸 월세는 6만엔을 넘는다. 뭘 더 생각하랴.
난 모든 서류에 도장 찍고 당장 지금 사는 곳에서 짐을 뺐다. 없는 살림이라 포장이사를 부를 수도 없어 술 한잔 사주고 친구 차를 빌려 짐을 날렀다. 그렇게 나의 난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감각기관중 가장 먼저 마비되는게 후각이라더니, 곰팡이 냄새, 오래된 다다미 냄새에는 금방 적응이 되었다. 여기 저기 방향제를 둔 덕분에 집에서 나는 냄새도 썩 나쁘지 않았다. 낡은 목조 건물이라 그런지, 밤이되면 가볍게 집이 흔들리곤 했다. 커다란 트레일러 트럭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흔들리는 집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집이 그런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집 여기 저기서 끼익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이 집에서 몇 달 잘 버티면 파칭코로 날린 생활비를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따위로 살거면 한국으로 당장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고함소리를 듣지 않아도 이 고난의 행군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끼기기기기긱.
그 날 따라 집 여기 저기서 끽끽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은 신경이 거슬렸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난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한번에 들이키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반듯이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천정에 그려진 작은 문양들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다. 마치 서양 사람들이 양 한마리, 양 두마리, 양 세마리를 세듯이. 문양을 몇 개까지 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난 어느 시점에서인가 잠이 들었다. 분명히 잠이 들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디선가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똑 똑 똑…. 몸은 잠에 빠져 있던 지라 움직이지 않았지만 의식만큼은 깨어서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똑, 똑, 똑하고 규칙적으로 떨어지던 물소리가 갑자기 주르륵 하고 흐트러졌다. 그리고선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위로 떨어졌다. 몹시도 차가운 물방울이었다. 순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천정에서 비가 새는 모양이다. 싸구려 집에서 살다보니 드디어 이런 꼴을 당하는 구나. 나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조금 정신이 든 나는 가느다랗게 실눈을 떴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밖에서 들어오는 난바의 네온 불빛때문에 방 전체는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흐릿하게 보이던 방안이, 눈동자의 촛점이 맞으면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그 순간 난 숨이 턱 막혔다. 하얗고 늘씬한 다리, 그렇다 그것은 여자의 다리였다. 여자의 두 다리가 내 머리 위에 있었다. 그 늘씬한 다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미니스커트가 보였고 그 안쪽으로 두 다리가 이어지는 곳에는 하얀 팬티가 보였다. 똑…. 그 팬티의 앞섶에서 흘러 나온 물 한방울이 내 볼 위로 떨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이 여잔 또 누구고? 꿈인지 생시인지, 아니면 가위에 눌려 헛것이라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난 여전히 실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우직끈.
그 순간이었다. 뭔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길고 검은 것이 툭하고 아래로 쳐진다. 여자의 머리칼이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떨군 여자의 머리도 보였다. 난 화들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 소리와 함께 두 다리, 아니 여자의 몸 전체가 좌우로 천천히 흔들리는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 머리는 천정으로 이어지는 끈에 묶여 있었다.
으아아악
난 소리를 지르며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여자의 두 다리를 감싸 들어올렸다. 상황판단은 여전히 안되고 있었지만 이 여자가 목을 매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숨이 막히지 않게 다리를 들어올려야 겠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든 것은 그 생각 뿐이었다. 다리를 들어올리며 몸을 일으키느라 내 머리는 여자의 하늘하늘한 미니스커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코 앞에 여자의 팬티 앞섶이 있었다. 살짝 비쳐보이는 팬티의 앞섶으로 거뭇거뭇한 여자의 음모가 비쳐보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난 여자의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때 여자의 팬티 앞섶이 조금씩 움찔거리는것 같더니 그곳에서 주르륵하고 물이 떨어져 내렸다. 몹시도 차가운 물이. 그러나 냄새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오줌이었다. 오줌은 여자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아랫쪽으로 흘러내려갔다. 그녀의 난 스커트 안쪽에서 머리를 빼 위를 쳐다 보았다. 긴 머리의 여자의 고개는 완전히 오른 쪽으로 꺾여 있었다.
으아아악
난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 곳은 다름 아닌 내 방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책상위에 놓인 책, 이불, 걸려 있던 옷들. 여기는 틀림없는 내 방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누구인가? 난데없이 남의 방에서 목을 매달고 있는 이 여자는? 난 그 여자의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그때 또다시 윗쪽에서 우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꺾이는 듯한 몹시도 기분 나쁜 소리였다. 그러더니 힘없이 꺾여 있던 여자의 머리가 천천히 들어올려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럴 때마다 뚝 뚜둑하는 소리가 같이 들려왔다.
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악
난 또 다시 소리를 내 질렀다.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새하얀 얼굴에 기분나쁠 정도로 짚은 속눈썹 사이로 휑하게 뚫린 검은 눈이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여자의 두 다리를 감아쥐고 있던 내 두 팔이 덜덜덜 떨려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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