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 추억 - 3부❤
작성자 정보
- 최고관리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14 조회
- 목록
본문
대물 추억(大物 追憶) --- 3 내 자지와 관련 해 아주 어릴 적 기억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어무이, 빨리 온나! 영도 또 피 난다." 밭일을 하다 막 싸릿문을 들어서는 엄마를 향해 누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마루에서 둘째인 영숙이 누나와 세째 영미 누나 사이에 엉거주춤 선 채 울고 있었다. "에그, 이 문디 자슥. 또 사달 냈구나." 엄마는 내 머리를 한번 쥐어 박고 얼른 약상자를 꺼내 왔다. 탈지면과 '빨간약'이라고 불렀던 머큐롬, 다이아찐 연고, 지혈제로 쓰는 오징어 뼈가루, 가제와 붕대 등등 이 들어 있었다. 런닝셔츠만 입고 아래는 벗고 있는 내 자지와 불알 주변에는 피 고름이 범벅 져 있었다. 엄마는 농사 짓는 시골 여자 치고는 능숙한 솜씨로 처리 한다. 이미 이런 일들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눔의 가스나들아. 집에 있으면서 동생 하나 못 봐주나?" 응급 조치를 끝낸 엄마는 우선 두 누나에게 화를 냈다. "숙제 하다 우는 소리 나서 나와 보이 이래 됐더라. 지 혼자 사루마다 벗고 후집어 터뜨렸는데 낼더러 우찌 라꼬 ... ?" 영미 누나가 반발 했다. 어릴 적 부터 성질이 못 돼 어른이 꾸중을 다소곳이 듣는 법이 없다. "이 가스나가 뭘 잘 했다고 말 대답이고?" 엄마는 방 빗자루를 들어 막내딸을 후려 쳤다. 그 무렵 우리 집에서는 흔히 일어 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날 일이 오래도록 기억 되는 것은 상황이 더 복잡하게 전개 되었기 때문이다. 반발하는 영미 누나를 더 때리자 누나는 더욱 바락 바락 대들었고, 급기야 엄마의 히스테리가 폭발 했다. 엄마는 영숙이 누나까지 싸잡아 흠뻑 매질을 했다. "이 애물 단지야. 니 죽고 나 죽자!" 그리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내 몸을 뒤흔들며 윽박 질렀다. 4살 배기 아이에게 그런 경우 저항이나 방어 수단이라고는 그저 우는 일 뿐이다. 나는 평소보다 더 심하 게 울부짖었다. 한참을 울어 대다 아직 훌쩍거리는 나를 엄마는 달래기 시작했다. "하기사 어린 니가 무슨 잘못이고? ... 다 에미 잘못이다. 내가 죽일 년인기라." 엄마가 나를 폭 끌어 안자 나는 늘 그래 왔듯 엄마의 앞섶을 제치며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래, 젖 묵고 자그라." 엄마의 따독거림 중에 나는 빈젖을 빨려 또 한손으로는 남은 젖통을 주므르며 잠이 들었다. 엄마의 말이 옳다. 사실 내 잘못은 아닌 것이다. 그 비극적 사고는 내가 생후 5~6개월 될 무렵 쯤 일어났다고 한다. 아들을 방에 재워 놓고 김매러 같던 엄마는 젖이 불은 것으로 아들도 배 고플 때가 된 것을 알고 중간에 집 으로 돌아 왔다. 막 집안으로 들어 서던 엄마는 불길한 예감으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녀를 슬슬 피하며 바같으로 나가는 강아지의 입에 피가 묻은 것을 본데다 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 왔기 때문이다. 자지러 지게 우는 아들의 하반신은 피투성이었다. 아들을 안고 나와 울부짖는 소동에 남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한 노인네의 말에 따라 우선 상처 부위에 간장을 부었다. 아기는 이제 울지도 못하고 눈을 까 뒤집은 채 숨 만 깔딱거릴 뿐이었다. 일단 40리나 떨어진 읍내 병원으로 가야 한다. 지금 아기의 상태로 보면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살아 난들 뭐 하누 --- 대부분 마을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정구역상으로 경북 내륙 지방의 금촌리로 불리는 이 마을에는 '금촌 괴담'이라고 할만한 무섭고도 애절 한 사연이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었다. 한 30년 전에도 이 마을에는 오늘 같은 일이 일어 났다. 갓 돌이 지난 아기의 자지를 개가 완전히 물어 뜯어 버린 것이다. 거창댁으로 불리는 그 아기 엄마는 대청에서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빨래를 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 이 응가 할 낌새를 보이자 늘 하던 대로 마루 끝에 안고 나와 가랭이를 벌려 주고는 "워리, 워리!"하고 불렀 다. 아들이 똥을 누는 중에 거창댁은 시어머니와 이야기를 주고 받느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안고 있 는 아들이 갑자기 묵직해 지고, 밑에서 무언가 세차게 당기는 것을 느끼고 내려다 본 순간 경악했다. 늘 아들의 똥을 받아 먹던 누렁이 위리가 아니라 송아지만한 검정개가 보였기 때문이다. 비명을 질러 대자 그 검정개는 곧바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그 개의 입에는 몽땅 섟?나간 아들의 자지 와 불알이 물려 있었다. 이 돌발적이며 끔찍한 사건이 섹스와 관련되었다는 것도 좀 아이러니칼 하다. 다만 사람이 아니라 동물들 의 일이지만. 그날 우리 마을의 한 암캐가 암내를 풍기자 이웃 마을 개까지 10여마리가 몰려 들었다. 숫놈들은 한동안 으르렁 거리며 힘겨루기를 했고, 결국 그 암캐를 올라 탄 것은 거창댁 네의 워리였다. 그래서 주인이 새참 을 준다고 부르는데도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 이웃 마을에서 원정까지 왔으나 제 씨를 뿌리는데는 실패한 검둥이가 마치 앙갚음이라도 하듯 연적 의 주인 집에 행패를 부린 것이다. 참혹한 일을 겪었지만 아기는 그런대로 무럭 무럭 잘 자라 청년이 되었다. 아니, 겉으로 보기에는 마을에서 제일 돋보인다고 할만큼, 농사꾼답지 않게 희뿌연 피부에 콧날이 우뚝한 준수한 용모에다 힘도 좋아 볏섬도 번쩍 드는 장정이었다. 처음 본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이웃 마을에서는 그를 먼 발치에서 보고는 상사 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럴 때면 금촌리의 청년들은 질시 어린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글마, 불알 깐 돼지와 다를 께 뭐꼬. 뽀얗게 살이 올라 먹음직 해 보이지만 사내 구실을 못 하이 말짱 헛 꺼 아이가." 마을의 같은 또래 처녀 총각들이 시집 장가들을 가면서 그 말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로 판명 되었다. 당시 금촌리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먹는 문제가 제일 큰 일이었지만 그 다음의 중대지사는 짝을 찾는 일이 었다. 먹는 것이 생존 수단이라면 시집 장가는 바로 삶의 목적 같기도 했다. 그래서 때가 되면 누구나 짝을 찾았다.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혼사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 다. 이를테면 훤칠한 청년과 누가 봐도 지독히 못 생겼거나 모자란 처녀가 짝을 맺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 었다. 또 겉으로 보기에 그 청년보다 훨씬 심한 불구자나 팔푼이도 다 시집 장가를 갔다. 그럴 때 한쪽이 치우치 면 그만큼 돈이나 땅이 대신해 주기도 하고 비슷한 처지 끼리 어울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팔푼이 총각과 절름발이 처녀가 부부의 연을 맺는 식으로. 그러나 금촌리의 군계일학 청년은 끝내 짝을 찾지 못했다. 더러 혼담이 있기도 했지만 사연을 알게 되면 모두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들며 돌아서는 것이다. 청년은 26살 되던 해 소나무 가지에 목을 걸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마을에는 해괴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를테면 그를 '불알 깐 돼지'라고 놀렸던 남자는 똥을 누려 변소깐에 쭈구리고 앉아 있으면 불쑥 밑에서 손이 하나 올라와 그 남자의 불알을 쓰다듬으며 "니 좆 좀 빌리 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그 청년에게 연애 편지까지 보냈으나 결국은 좆이 제대로 달린 남자에게 시집간 여자는 어느 날 남편 이 이불을 푹 되집어 쓰고 자길래 제껴 보니 바로 그 청년이 눈을 찡긋하며 능청스럽게 웃고 있더라는 식 이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은 "총각 귀신이 처녀 귀신 보다는 힘도 세고 더 무섭다."라는데는 인식을 같이 했다. 생후 5~6개월짜리 아기가 또 개에게 당하자 사람들은 이제 거의 잊혀져 갈만한 전설을 떠 올리며 웅성거 렸다. 일단 읍내 병원으로가려고 막 집을 나서려는데, 대낮인데도 술냄새를 잔뜩 풍기며 다리를 약간 저는 한 중 년 남자가 들어섰다. 문광수씨라고 내게는 할아버지 항렬인 이곳 주민이다. "어디 내가 한번 봅시다" 그는 앞을 막으며 포대기를 들추었다. 갖난 아기 몸에도 그렇게 피가 많이 있을까 놀랄 정도로 피가 벌써 흥건히 괴어 있었다. "이런 상처는 우선 지혈과 소독을 잘 해야 하는데 ... 누가 여기다 간장을 부었소?" 그는 아기의 가랭이와 두덩을 압박하며 알코올을 찾았다. 그러나 누구 집에도 소독용 알코올은 없었고, 소 주도 도수가 약하다고 하자누군가 40도짜리 백알로 담그었다는 뱀술을 가져 왔다. 그 술을 상처에 붓자 아 기는 비명도 못 지른 채 다리만 잠시 파닥거렸다. 광수씨는 아직도 간간히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를 맨 손가락으로 여기 저기 들추어 보았다. "이 애가 죽을지 살지는 지금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응급처치를 해 놓았으니 한두시간 병원에 늦게 갔 기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제몸도 가누지 못할만큼 취해서 혀 꼬부라진 소리가 나오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아이는 생식기가 다 으깨 져 조직도 꽤 손상이 갔지만 여기서 빨리 수술하면 어느 정도 봉합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몇시간 걸려 병원에 가면 어떤 명의도 손 쓸 수 없게 시기를 놓지게 되죠. 나중 에 남자 구실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짜라꼬요? ..." 엄마는 울먹이며 물었다. "내가 해 볼께요." 구경꾼들이 웅성거렸다. "한시라고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는 채근과 "광수 말대로 해야 한다"는 찬반 양론 으로 갈라 졌기 때문이다. "조카댁, 나를 한번 믿어 주소. 최선을 다 할께요." 두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닭싸움 하듯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상대의 눈을 노려 보고 있었다. 그 리고 엄마는 결단을 내렸다. 포대기를 건네 주며 나직히 말했다. "해 주소!" 그래서 격전지의 야전병원보다 더 조악하며 엉성한 수술이 시작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를 물어 뜯은 가해자가 갓 젖을 뗀 강아지였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타고 난 야성적 본능으로 첫 사냥을 시도했건만, 아직 힘이 없어 먹이를 몇차례나 잘근 잘근 씹어 대다가 인기척에 더 이 상 사냥을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사냥감은 여전히 처참했다. 번데기 만한 고추와 겨우 완두콩 만한 고환,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 싼 피부가 마치 실컷 씹다 버린 고기점처럼 짓 이겨져 있었다. 돌팔이는 당시 외과병원에서 쓰는 기초 의료 기구는 갖고 있었지만 마침 봉합사, 즉 실이 며칠전 상처난 마을 사람을 꿰메느라 다 떨어 져 버렸다. 그래서 명주실로 대체해야 했다. 수술은 두어시간을 끌었다. 돌팔이는 땀을 비오듯 흘려가며 가끔은 피가 묻은 채의 고무 장갑 낀 손을 내 밀었다. 바로 옆에 앉아 땀을 닦아 주던 엄마는 그때마다 소수잔을 쥐어 주었다.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처한 상황 에서 술을 찾는 주정뱅이가 밉쌀스럽지만 그 반짝거리는 눈빛의 진지함 때문에 어떤 투정이나 거절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일 때문에 사고가 나고서도 대여섯시간이나 지나서 아기는 겨우 읍내 정식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 었다. 상처 부위는 손을 대기 전보다 더 처참했다. 바늘자국과 실오라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으며, 원래의 형 체가 어땠는지 짐작도 할 수 없이 뒤범벅되고 잔뜩 부어서 어른 주먹만한 고깃덩어리가 있을 뿐이었다. 의사는 그 고깃덩어리를 핀셋으로 한참 휘집어 보다가 마을사람이 꿰맸다는 말을 듣자 표정이 바뀌며 말 했다. "의사도 아닌 사람이 손을 댔으니 우리는 책임 못져요. 상처에는 다시 손을 안 댈테니 주사 맞고 약이나 받 아 가도록 하시오." 그러나 그 의사가 당시 간호원에게 했다는 말을 엄마는 뒤에 줏어 듣게 되었다. "거칠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맞춰 놓기는 했더군. 안 그랬으면 그 애는 살아 나더라도 고자를 면치 못 했을텐데 ... 그런데 그만한 솜씨를 가진 놈이 어째 바느질 실로 마감을 했을까?" 고자가 될 뻔 했던 나를 구해준 문광수씨는 꽤 유별난 인생을 살아 온 사람이었다. 그는 한 때 "사방 3백리에 명성을 떨쳤다"는 우리 마을의 수재였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약간 절지만, 15리 쯤 떨어 진 내리 국민학교와 읍내의 중학교에서 그는 항상 전교 1등을 했다.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하기에 대구의 야간 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그곳에서도 그는 수석을 놓지지 않았 다. 선생들은 그에게 대학 진학을 권유했다. 그도 의대나 법대를 가고 싶은 것이 당시로서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부모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고학을 하고 장학금을 타서 혼자 힘으로 해 내겠다"며 사정을 해 봤지만, "동생이 여섯이나 되는데 네가 빨리 취직해서 한푼이라도 벌어야 되지 않느냐"는 부모의 주장에 그는 결국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는 담임의 소개로 한 외과병원에 소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병원은 당시 대구에서 가장 이름 난 병원중 의 하나였다. 의대 교수와 대학병원 외과과장을 역임하고 개업 한 원장은 전국적으로 손가락 꼽을만큼 명의로 인정받 고 있었으며, 저명한 인사들로부터 소시민에 이르기까지 항상 환자가 득실거렸다. 개인병원인데도 수술실은 3개나 있었고 젊은 의사들도 항상 3~4명이 고용되어 있었다. 숙식을 하면서 청소와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소사라는 직책의 광수씨는 그 병원에서 최하급의 종사원이었 다. 그러나 타고 난 총명과 눈썰미가 차츰 주목을 받게 되면서 그는 몇년만에 진원장의 가장 총애하는 직원으 로 변모하게 된다. 그는 때로 복잡하거나 거추장스런 심부름도 잘 처리 했다. 차츰 병원 사람들은 그를 더 많이 부려 먹었다. 그런데 어떤 일이든 척척 잘 해 냈다. 이를테면 장부기장이나 차트 정리나 심지어 약사 보조를 하면서도 그의 능력은 항상 뛰어 났다. 1년쯤 뒤 그는 수술실의 조수로 참여했다. 여기서도 그의 출중함이 곧 들어났다.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했 지만 눈매가 익어 가면서 절개, 적출, 봉합등의 작업도 뜸뜸이 맡겨 봤다. 지켜 보던 원장은 혀를 찼다. 10년 안팎을 공부와 실습으로 지새워 온 젊은 의사보다, 아니 자신이 팔팔했 던 시절보다 그의 솜씨가 한결 나은 것이다. 그는 원장의 입회 하에 간단한 수술의 전 과정을 혼자 처리 했다. 얼마 후에는 젊은 정식의사들을 다 내보 내고 그 병원의 대부분 수술을 그가 도맡아 했다. 상황이 이렇게 까지 된 것은 이 병원만의 특별한 내막도 작용했다. 의사, 특히 외과 의사중에서 가끔 보게 되듯 원장은 심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는 자기 병원에서 쉽게 얻 을 수 있는 마약도 주사하면서 심신을 스스로 파괴시켰다. 원장이 왜 그런 지경이 됐는지를 임상학적으로 규명하기는 어렵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유능하고 존경받 는 의사였다. 가정적이나 우전적으로도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술과 마약으로 허물 어 져 갔다. 수술 실력은 날로 늘었지만 광수씨도 슬슬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갖게 됐다. 대우도 좋았고 하는 일도 재 미 있었지만, 들어내지 못하고 하는 이런 일은 남의 그림자 노릇에 불과하다. 그래서 병원을 떠날 결심을 했다. 그러나 원장은 그를 만류했다.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원장은 당시 대학 3학년인 막내딸이 졸업하면 결혼을 시키고,뒤늦었지만 의과대학도 보내 정식 의사면허 를 따도록 하고, 이 병원도 물려 주겠다고 했다. 원장의 말이 꼭 사기이거나 감언이설이 아닐 수도 있다. 원장은 실제로 그를 총애했고, 그 보석같은 자질 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동화처럼 전개 되지 않았다. 우선 막내딸이 그의 아내가 되기를 거부 했다. 원장이 억지로 데이트도 시키고 결혼을 설득하기도 했지만, 아무 어려움 없이 공주 처럼 자란 그녀는 이 절름발이에다 촌놈 무지랭이 한테 자신의 장래를 맡길 생각은 꿈에도 없었던 것이다. 딸은 연애하던 한 부 잣집 청년과 결혼했다. 광수씨는 다시 병원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원장의 제의에 다시 눌러 앉았다. 원장은 그의 월급을 크게 올려 주었다. 그것은 10여년 경력의 전문의가 받을 만한 액수였다. 은밀한 거래였지만 광수씨도 나쁠 것이 없었다. 그는 타고 난 총명과 눈썰미로 남들보다 10년을 앞서 가 는 셈이었다. 그도 결혼을 해서 첫딸도 낳고 경제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새로 전개된 상황도 동화같은 결말을 맺지는 못했다. 그는 원장의 의료 기술만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인간적 약점도 닮아 갔다. 그 역시 알코올과 마약 중독 자가 된 것이다. 인성이 파괴된 그는 생활도 무절제 해 졌다. 하루는 밤늦게 응급환자가 왔는데 그는 원장에게 보고도 않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수술을 하다, 공교롭게 도 그 환자가 죽었다. 꼭 광수씨의 잘못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 전에도 그는 음주상태에서 더러 수술을 했고, 확률적으로 그 환자는 사망에 이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올가미는 그를 피할 수 없도록 옭아 맸다. 그는 음주 상태의 무면허 의료행위로 살인죄로 기소 되어 징역 3년형을 고스란히 채워야 했다. 출감해서 얼마 후 그는 한 변호사 사무실에 서기로 일자리를 얻었다. 교도소 생활에서 법이 그의 관심을 끄는 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떻든 그는 여기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매끄럽고, 때로는 고등고시를 패스하고 검사 생활을 10여년이나 한 변호사보다 더 논리적인 변론문을 그가 작성하면 변호사는 그저 법정에서 읽어 대기만 하는 일도 흔해 졌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점점 더 허물어져 갔다. 꼭 돈이 탐나서도 아닌데 그는 사건 브로커 노릇을 하게 됐 고, 이것이 문제가 되자 전과도 참작 돼 다시 징역 1년형을 복역 해야 했다. "다시는 메스나 펜을 잡지 않겠다. 먹물들은 모두 도둑놈인 것은 틀림 없지만 바탕 없이 그 세계에 뛰어 든 나도 미친놈이며 바보지." 그는 이런 말을 하며 노동판도 기웃거리고 고향에 돌아 와 농사도 지어 봤지만 결코 그전처럼 광채 나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 오히려 끝 없이 추락해 가기만 하는 인생이었다. 어떤 일도 오래 지속을 못했고, 인간성은 더욱 음침하게 괴퍅스럽게 변해 갔다. 음주량만큼 술주정도 심해 지고 끝내 아내는 딸을 데리고 가출해 벼렸으며, 그는 몇년전 완전히 망가진 폐인이 되어 고향으로 돌와 왔다. 그에게 "돈을 벌어 오라"고 채근했던 부모는 이제 오히려 근심거리며 무거은짐더미니를 맡게 된 것이다. 어떻든 나는 그 주정뱅이, 폐인이 된 광수할배의 솜씨로 고자가 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는 벗어 날 수 있 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이 먀냥 행운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은 고통과 시련의 시작이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