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 - 3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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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도 사라진 군산의 바닷가 외항의 항구에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여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외항에는 정박해있는 외국선박 몇 척이 작은 섬처럼 떠 있었다. 항구로 들어오는 도로와 도심지로 빠지는 길목에는 검문소와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있고 정복을 한 경찰과 사복형사들이 잠복근무를 하고 있었다.
관음사 방향에서 전조등을 켠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검문소 앞으로 다가와서 멈추었다. 구급차의 운전석 유리창이 내려지고 흰 가운과 마스크를 구급대원이 다가오는 검문경찰에게 증명서를 내보였다. 검문경찰이 증명서를 받아들고 손전등으로 비추어 확인한다. 경찰은 확인한 증명서를 구급대원에게 돌려주고 통과 신호를 보낸다. 검문소를 통과한 구급차가 항구에 정박 중인 중국 상선 가까이 다가가서 멈추어 선다. 상선에 설치된 철사다리로 네 남자가 들것을 들고 내려왔다.
부두에 인접한 곳에는 전조등은 물론 미등마저 끈 경찰 버스와 경찰차가 대기 중이었다. 경찰차 조수석에는 조병문 경정이 쌍안경으로 중국선박을 주시하고 있었다. 뒷좌석에는 임 경위가 수시로 잠부근무 경찰과 검문소에 연락을 취하는 무전기 소리가 들린다. 들것에는 붕대를 감은 환자가 누워 있었다. 들것을 든 남자들이 구급차 뒤로 다가갔다. 구급차 뒷문이 열리고 남자들이 들것에 누운 환자를 구급차에 실었다. 조 경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건 뭐지?”
“위급환자인데, 도경에 하선 허락을 받았답니다.”
무전기로 연락하고 있던 임 경위가 대답을 했다. 구급차에 들것을 옮겼던 남자들이 다시 배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쌍안경으로 세심하게 살피던 조 경정은 그래도 미심쩍었다.
“검문소에 연락해서 구급차 안을 수색하여 내용을 확인하라고 해”
“네.”
지시를 받은 임 경위가 검문소와 무전 연락을 했다. 무전기와 연락하는 전파 음이 흘렀다. 환자를 실은 구급차가 검문소로 향해 달려갔다. 검문경찰에 의해 구급차가 멈추어 섰다. 검문경찰이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확인 사항이 있으니 뒷문 여시오.”
“위급한 환자인데요.”
“잠시면 되니 열어.”
“네.......”
강압적인 검문경찰 말에 조수석에 앉았던 구급대원이 내려와 구급차 뒷문을 열었다. 구급차 안에는 다른 구급대원이 피투성이가 되어 붕대를 감고 있는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문 경찰이 구급차 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수색하였다. 의료도구와 약품뿐이 보이지 않았다. 검문경찰은 환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살갗이 푸른빛을 띤 환자는 숨도 쉬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거 완전히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잖아!?”
중얼거린 잠복경찰은 구급차에서 내려 운전석에 앉은 구급대원에게 통과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무전기를 들고 수색한 결과를 임 경위에게 보고했다. 검문을 마친 구급차가 도심지로 향하는 도로로 질주해 사라졌다.
경찰차 안에 앉아있던 조 경정은 쌍안경을 들고 부둣가를 살피며 수시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아까부터 중국성선 주변에 정차해있는 트럭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밀수품이 운반될 예상 시간이 지나고 있어 초조해졌다. 이제 조 경정이 어떤 결단이든 지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모두 하차해서 수색하라고 해.”
“네”
뒷좌석에 앉았던 형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잠시 뒤에 경찰 버스에서 정복경찰과 사복형사들이 우르르 내렸다. 조 경정도 차에서 내려 부둣가로 향했다. 경찰들이 중궁상선 옆에 있는 트럭으로 다가가 수색을 하였다. 엔진이 식어 있는 트럭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찰들은 철사다리를 올라가 배안으로 잠입했다.
조 경정은 선장실로 들어갔으나 텅 비어 있고 선장이 보이지 않았다. 손전등을 든 경찰들이 조를 짜서 흩어져 기관실. 선원실. 화물칸. 조타실. 갑판 등을 수색하고 다녔다. 선장실을 나온 조 경정은 조타실에서 선장을 만날 수 있었다. 선장에게 수색영장을 내보였다.
“서울시경의 강력반에서 나왔소. 밀수 정보가 들어와서 수색하니 협조 바라겠소.”
“이거야! 우린, 물건 실으러 왔습네다. 아무것도 없시오.”
선장은 중국 사람이었지만 서툰 북한 말씨를 썼다. 조 경정은 갑판에서 수색하고 나오는 경찰들을 기다렸다. 선박을 구석구석 수색하던 경찰들이 조를 이루어 갑판으로 몰려들었다.
“무슨 결과가 없었나?”
“없었습니다.”
“화물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원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타실도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경찰들은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대답을 했다. 조 경정은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봐도 중궁상선에서 하역작업이나 물품은 물론 사람도 육지로 내려오지 않았다. 단지 들것에 실린 환자만 구급차로 운송 된 것이다. 조 경정이 급하게 임 경위를 불렀다.
“검문소를 나간 구급차 차량번호를 조회하고 추적 하도록 해.”
“네.”
경찰들이 줄을 지어 철사다리를 이용해 육지로 내려왔다. 경찰들을 태운 경찰차와 경찰 버스에 전조등과 미등이 어둠 속을 밝혔다. 비상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와 경찰 버스가 구급차가 사라진 도심지를 향해 질주해 갔다. 군산 외항이 잇는 부둣가에는 어둠과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부두의 검문소를 빠져나온 구급차는 사이렌을 울리고 사내를 질주했다. 사내를 벗어난 구급차는 사이렌을 멈추고 어둠 속을 달렸다. 구급차는 옥산면을 지나 청암산 중턱을 오르고 있었다. 구급차는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철문이 열려진 용두목장 안으로 들어가 멈추었다.
구급차의 전조등이 꺼지고 건물 안에서 나온 사람은 곽춘호였다. 흰 가운을 걸친 남자들은 재빠르게 구급차의 뒷문을 열고 환자를 들것에 실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곽춘호가 거실안의 한쪽 벽면에 세워진 진열장을 밀어내니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남자들은 들것을 들고 지하실로 운반하였다. 곽춘호가 한 남자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수고했어. 자네는 구급차를 세차해서 증거 될 만할 것을 없애고 전주에 버리도록 해.”
“네. 큰 형님.”
남자는 구십도 각도로 인사를 하고 건물을 나갔다. 잠시 후 시동 거는 소리에 이어서 구급차의 엔진소리가 멀어져 갔다. 지하실에 여러 개의 전등이 밝혀졌다. 지하실 가운데의 침상위에는 환자가 주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곽춘호와 남자들은 침상 부위로 몰려들었다. 한 남자가 환자가 감고 있는 붕대를 풀었다.
붕대가 풀려지고 나타난 모습은 환자가 아니라 시체였다. 온몸이 시퍼렇게 변한 살갗이었고 목 밑에서부터 하복부까지 절개된 부위는 가마니를 꿰매듯이 엉성하게 봉합되어 있었다. 피로 물들인 시체는 감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광경을 지하실 문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선잠이 들었다가 어수선한 소리에 깨어난 이진아였다. 거실로 나오니 진열장이 옮겨져 있는 벽에 어두운 공간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기에 층계를 내려 왔던 것이다.
문틈으로 들어난 지하실 광경에 이진아는 치를 떨었다. 환한 불빛아래 들어난 침상위에는 물에 퉁퉁 불은 듯이 부풀어 오른 시신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남자들이 짐승의 껍질을 벗겨내듯이 시신의 봉합된 상처 속에 손을 넣고 피부를 뜯어냈다. 가죽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시체의 내부가 들어났다.
시체에는 내장이 없었고 비닐봉지들이 꽉 들어 차있었다. 곽춘호가 봉지 하나를 뜯어내니 하얀 분말가루가 나타났다. 분말가루는 그들이 밀수입한 필로폰이었다. 분말가루를 찍어 혀끝에 대고 입맛을 다신 곽춘호의 얼굴에 희소가 흘렀다.
“이건 순도 백 프로야. 수고들 했어.”
“저희들은 큰 형님 지시만 따랐을 뿐. 축하 합니다.”
“아직 일러. 이걸 실수 없이 넘겨야 안심하지.”
“정 힘들면 짱 밟히기 전에 일본으로 보내죠?”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짱깨들이 물건 값 먼저 달라고 하는 게 문제야.”
“나중에 줘도 되잖아요.”
남자들이 시신에서 분말가루가 담긴 비닐봉지들을 꺼내 트렁크에 담기 시작했다. 비닐봉지가 꺼내질 때마다 시신의 내부는 피가 엉겨 붙은 동굴처럼 비어갔다. 곽춘호가 들고 있던 봉지를 묶어서 트렁크에 던져 넣었다.
“아니, 큰 거라서 급하다고 하니 신용은 지켜야지. 그건 그렇고 너희들은 내일부터 K지시대로 권진경이라는 여자를 찾아야 돼.”
“남산에서 김 씨 찾기 아닙니까? 그건 힘들 것 같은데요.”
“그래도 우리 뒤를 봐주는데 노력해 봐야 돼. GIS 정보에 의하면 그 여자가 개명했을 수도 있다니까. 애들 풀어서 찾아봐. 경찰에서도 찾고 있으니까.”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던 이진아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K는 누구고, GIS는 누구이기에 곽춘호의 뒤를 봐준다는 말인가. 그들은 누구이기에 경찰력까지 동원할 수 있고, 무엇 때문에 권진경이라는 여자를 찾고 있는지. 곽춘호는 왜 그들의 지시에 복종하는지 이진아의 의혹이 증폭되었다. 공포를 느끼는 지하실의 광경에 이진아는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이 오싹하였다. 문득 층계 위로 통하는 거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라는 것 같았다.
하얗게 질린 이진아는 재빠르게 층계를 올라가 거실로 들어섰다. 세면장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얼른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면장에서 나온 것은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잠옷 차림의 김애경이었다. 농염한 몸매의 그녀가 양손을 허리에 집고서서 눈살을 찌푸렸다.
“너, 왜 안자고 나와 있는 거야? 누구한테 꼬리치려고.”
“목말라서 물 마시려고요.”
이진아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김애경은 곽춘호가 이진아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진아에게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며 구박을 하였다. 김애경의 시선을 의식한 이진아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엉겁결에 잠자다가 나와서 팬티 차림이었다. 다행히 허벅지까지 가리는 남자의 커다란 와이셔츠를 걸친 것이 다행이었다.
겸연쩍은 모습으로 돌아선 이진아는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거주하는 방은 주방 안으로 통하는 곳에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이진아는 지하실의 광경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로서 감당할 수 없는 음모가 곽춘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전남 도경의 수사과 안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서울시경에서 나온 조병문 경정은 밤새도록 중국 상선에서 환자를 실고 나온 구급차를 추적하느라고 피곤했다. 수사과 안에는 조 경정과 같이 서울에서 내려온 서울시경 형사들과 현지 형사들이 뒤엉켜 전화와 무전기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의자에 몸을 묻은 조 경정은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임 경위가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흔들었다.
“계장님! 전주에서 구급차를 발견했다는데요.”
“그래!? 그럼 가봐야지.”
눈을 감고 있던 조 경정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임 경위가 입맛을 다셨다.
“가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
“도경 형사들이 수색해 봤는데, 사람의 흔적이나 물건들은 없고 깨끗하게 세차되어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럼, 구급차가 다닌 경로나 목격자가 있는지 탐문해봐.”
“네!”
돌아선 임 경위가 들고 있던 수첩을 손바닥으로 치며 수사과 출입구로 다가갔다. 그가 출입문 앞으로 다가서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던 임 경위는 입을 쩍 벌렸다. 의외로 문을 열고 들어 선 사람은 강민우였다. 강민우는 조병문이 마약밀수사건 때문에 군산으로 출장을 간다는 말을 듣고 곽춘호가 떠올라 겸사겸사해서 내려온 것이다.
“아! 여기는 웬일로!?”
“임 경위도 와 있었네요.”
“네! 증거도 못 잡고 잠도 못 자고 말이 아닙니다. 저는 가볼 곳이 있어서.”
“수고하시오.”
임 경위가 꾸벅하고 수사과를 나갔다. 강민우는 두리번거리다가 창가에 의자에 몸을 묻고 있는 조병문 경정을 발견했다, 조 경정은 책상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강민우는 조경정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노이로제가 걸렸는지 조경정이 벌떡 일어나 눈을 부라렸다. 빙긋이 웃는 얼굴로 서있는 강민우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목쉰 목소리를 흘렸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고생하는 조 경정, 위로하러왔지. 어때?”
“말도 마! 놈들은 놓치고, 힘들어 죽겠어.”
“어떻게 경찰의 베테랑 수사관이 실수를 하나?”
“너무, 놈들을 쉽게 봤어. 놈들의 트릭이었어. 놈들이 구급차를 이용해 물건을 빼돌린 것 같아. 전주에서 구급차를 발견했다는군. 미치겠네.”
조 경정은 눈을 감은 채 넋두리 하듯이 말했다. 엉덩이 끝을 책상에 걸친 강민우는 유리창 밖을 내다보며 추리를 했다. 어쩌면 조 경정이 쫓는 마약 밀수 용의자들이 곽춘호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았다.
“구급차 흔적을 추적하는 중이겠군.”
“응. 잘못하면 장기 수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아침 식사는 했어?”
“임 경위와 해장국 한 그릇 뚝딱했는데 입안이 껄끄러워서.......”
“군산에서 유명한 꽃게 장으로 입맛을 돋워야지. 점심 식사는 병문이가 진급 턱으로 사.”
“알았어. 내가 사지.”
“그럼, 이따가 봐.”
책상에 걸터앉았던 강민우가 일어섰다. 그때까지도 의자에 등을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던 조 경정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졸음이 오는 눈동자를 껌벅거렸다.
“어디가려고?”
“잠간 다녀 올 곳이 있어.”
강민우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수사과 사무실을 나갔다. 강민우는 불곰 최중혁에게 가볼 생각이었다. 흐릿한 눈빛으로 강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 경정은 다시 의자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수사과 내에는 전화벨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리기도 하고 형사들은 전화와 무전기를 들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하며 혹은 심각한 표정들을 짓기도 한다.
청암산 중턱의 용두목장.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던 이진아는 뒤늦게 잠이 들었어도 동이 틀 무렵 깨어났었다. 거실로 나가니 뻥 뚫렸던 벽은 다시 진열장으로 가로 막혀 있었고 집안은 조용했다. 거실 뒤의 창문으로 내다보니 곽춘호와 김애경이 사슴우리에서 사슴들을 돌보고 있었다. 이진아는 김애경의 잔소리를 듣기 전에 아침식사 준비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사준비가 다 되었을 무렵 곽춘호와 김애경, 그리고 목을 길게 늘어트린 주승균이 헐레벌떡 뒤쫓아 들어왔다. 감애경은 뒤쫓아 들어오는 주승균이 못마땅한지 찌푸린 인상이었다. 앞서서 들어온 곽춘호가 주승균을 핀잔하듯이 말했다.
“넌 할 일도 없니? 아침부터 찾아오게.”
“하하~! 형님 연락받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밥그릇 농사라도 져야지요.”
헤픈 웃음을 흘린 주승균이 넉살을 떨었다. 곽춘호는 필로폰을 가져가라는 연락을 했으나 이렇게 일찍 주승균이 찾아 올 줄은 몰랐다. 그러니 김애경의 심사는 더욱 뒤틀리고 있었다. 그녀는 발끈해서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주방을 향해 소리 질렀다.
“얘! 애리야! 식사준비 안하고 뭐하니?”
“다 해 놨어요.”
타월에 손을 닦으며 이진아가 주방에서 쪼르르 나왔다. 곽춘호가 세면장 문을 열고 들어가고 주승균은 거실에서 눈치를 살핀다. 김애경은 공연히 빗자루를 들고 거실 바닥을 먼지가 나도록 획획 쓸어 부쳤다. 곽춘호가 세면장에서 나와 주방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주승균과 김애경이 주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들이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하고 이진아는 그들 앞에 놓인 컵에 일일이 물을 따라 주었다.
주승균이 식사를 하면서 이진아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옆으로 다가와 물을 따라 주는 이진아의 스커트 속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쳤다. 엉덩이를 더듬는 촉감에 이진아가 흠칫 놀랬다. 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쳐다보는 곽춘호와 마주쳤다. 이진아는 곽춘호를 시험하고 싶어서 주승균을 힐끗 쳐다보며 눈짓을 하였다. 곽춘호의 시선이 이진아의 엉덩이를 더듬는 주승균의 손을 향했다. 곽춘호는 주승균을 쏘아보며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으 흠~! 물건 가지러 왔지?”
“네........!?”
한손으로 반찬을 집어 들었던 주승균이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곽춘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곽춘호의 사나운 눈빛을 의식한 주승균이 이진아의 엉덩이를 쓰다듬던 손을 얼핏 빼냈다. 묘한 분위기를 느낀 김애경이 의혹스러운 눈빛으로 곽춘호와 주승균을 번갈아 쳐다봤다. 주스균이 무안함을 대신하여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여튼 형님 죄송스럽고 고맙습니다.”
“아우님은 매번 도와 달라고만 해요.”
영문도 모르고 김애경이 불만스러웠던 마음을 뱉어냈다. 이진아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곽춘호를 향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그들은 식사하느라고 침묵이 흘렀다. 입속에든 음식을 씹어 먹으며 곽춘호가 정색을 하고 주승균을 향해 툭 내뱉었다.
“50그램이면 충분하지?”
“아! 네.”
“짱개들이 자금을 달라는데, 너 현금 좀 마련할 때가 없니?”
“형님도 참! 제가 쇳가루 마련할 수 있으면 형님한테 손 벌리겠어요.”
수저를 들고 입안에 든 음식물을 씹던 곽춘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한다. 그리고 김애경을 향해 말한다.
“할 수 없군. 당신, 승균이 갈 때 같이 가서 은행에 좀 다녀와.”
“왜요........!?”
김애경이 수저를 놓으면서 곽춘호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하기 싫은 일을 시킨다는 표정이다. 곽춘호가 묵묵히 남은 밥을 수저에 떠서 입에 넣었다. 김애경에게 반문을 하지 말라는 모습이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김애경만 답답할 뿐이다. 여유를 두고 곽춘호가 말했다.
“통장 줄 테니까, 환전해서 마카오 은행구좌로 입금시키고 와.”
“.........네!”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김애경은 마지못해 대답을 한다. 곽춘호의 말은 거부할 수 없는 곧 명령이었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들은 습관처럼 이진아가 가져다주는 커피를 마셨다. 빨리 물건을 받아 가고 싶은 주승균은 단숨에 커피 잔을 비우고 느긋한 곽춘호의 눈치를 살폈다.
“물건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건 몰라도 돼. 기다려.”
곽춘호는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커피 잔을 비웠다. 주방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진아가 커피 잔을 치우러 거실로 나왔다. 슬그머니 일어선 곽춘호를 뒤따라 김애경도 일어섰다. 김애경은 침실로 들어가고 곽춘호가 진열장 상단에 있는 도자기를 옆으로 옮겨 놓았다. 그 자리에 보이는 스위치를 누르니 진열장이 스르르 이동하고 지하실로 통하는 어둠침침한 계단이 나왔다.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간 곽춘호가 잠시 후 검은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나왔다. 들고 나온 비닐봉지를 주승균 앞 탁자에 집어 던지듯이 올려놓았다.
“괜히 학교가지 말고 잘 가져다 써.”
“넵! 감사합니다. 짱 밟혀도 형님한테 피해 안 입힙니다.”
주승균은 굽실거리며 일어서서 비닐봉지를 들고 나갔다. 침실 문이 열리고 김애경이 투피스로 갈아입고 나왔다. 김애경은 뭐가 미덥지 못한지 곽춘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고 이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볼멘소리로 일침을 놓았다.
“애리야! 너, 내가 나갔다 올 동안 빨래 다 해놔.”
“네!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이진아가 힐끗 돌아보고는 거품난 수세미로 그릇을 문지른다. 머뭇거리던 김애경이 거실로 나가니 곽춘호가 통장, 도장과 입금시킬 구좌번호를 메모한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김애경이 현관문을 나서고 곽춘호도 뒤따라 나갔다. 승용차 시동 거는 소리에 이어서 둔탁한 엔진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곽춘호가 거실로 들어왔다. 이진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의 일거일동을 감지하고 있었다.
거실로 들어온 곽춘호가 주방 안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이진아의 등 뒤로 다가섰다. 이진아는 목덜미에 불어오는 곽춘호의 입김을 의식하고 긴장이 되었다. 김애경도 없고 곽춘호의 태도로 보아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등 뒤에 다가선 곽춘호가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우격다짐으로 블라우스 밀고 올라온 곽춘호의 손이 브래지어를 들추고 들어왔다. 젖가슴이 잡히는 순간 이진아가 몸을 비틀었다.
“아저씨 이러지 마세요. 아줌마가 알면 혼나요.”
“괜찮아. 애리 요구 다 들어줄게.”
“시. 싫어요. 이러시면, 이집에서 나갈 거예요.”
“나가기는.......! 네 요구 다 들어 준다니까.”
곽춘호의 손가락이 젖꼭지를 끼고 주물렀다. 이진아는 작은 통증과 함께 아릿한 감각을 느꼈다. 스커트위의 엉덩이에는 벌써 후끈 달아올라 발기한 남성이 마찰을 하고 있었다. 그때 거실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벨 소리도 무시하고 곽춘호의 손길이 이진아의 몸을 거칠게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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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뭐지?”
“위급환자인데, 도경에 하선 허락을 받았답니다.”
무전기로 연락하고 있던 임 경위가 대답을 했다. 구급차에 들것을 옮겼던 남자들이 다시 배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쌍안경으로 세심하게 살피던 조 경정은 그래도 미심쩍었다.
“검문소에 연락해서 구급차 안을 수색하여 내용을 확인하라고 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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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 사항이 있으니 뒷문 여시오.”
“위급한 환자인데요.”
“잠시면 되니 열어.”
“네.......”
강압적인 검문경찰 말에 조수석에 앉았던 구급대원이 내려와 구급차 뒷문을 열었다. 구급차 안에는 다른 구급대원이 피투성이가 되어 붕대를 감고 있는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문 경찰이 구급차 안으로 들어가 구석구석을 수색하였다. 의료도구와 약품뿐이 보이지 않았다. 검문경찰은 환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살갗이 푸른빛을 띤 환자는 숨도 쉬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거 완전히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잖아!?”
중얼거린 잠복경찰은 구급차에서 내려 운전석에 앉은 구급대원에게 통과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무전기를 들고 수색한 결과를 임 경위에게 보고했다. 검문을 마친 구급차가 도심지로 향하는 도로로 질주해 사라졌다.
경찰차 안에 앉아있던 조 경정은 쌍안경을 들고 부둣가를 살피며 수시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아까부터 중국성선 주변에 정차해있는 트럭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밀수품이 운반될 예상 시간이 지나고 있어 초조해졌다. 이제 조 경정이 어떤 결단이든 지내려야 할 시간이었다.
“모두 하차해서 수색하라고 해.”
“네”
뒷좌석에 앉았던 형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잠시 뒤에 경찰 버스에서 정복경찰과 사복형사들이 우르르 내렸다. 조 경정도 차에서 내려 부둣가로 향했다. 경찰들이 중궁상선 옆에 있는 트럭으로 다가가 수색을 하였다. 엔진이 식어 있는 트럭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찰들은 철사다리를 올라가 배안으로 잠입했다.
조 경정은 선장실로 들어갔으나 텅 비어 있고 선장이 보이지 않았다. 손전등을 든 경찰들이 조를 짜서 흩어져 기관실. 선원실. 화물칸. 조타실. 갑판 등을 수색하고 다녔다. 선장실을 나온 조 경정은 조타실에서 선장을 만날 수 있었다. 선장에게 수색영장을 내보였다.
“서울시경의 강력반에서 나왔소. 밀수 정보가 들어와서 수색하니 협조 바라겠소.”
“이거야! 우린, 물건 실으러 왔습네다. 아무것도 없시오.”
선장은 중국 사람이었지만 서툰 북한 말씨를 썼다. 조 경정은 갑판에서 수색하고 나오는 경찰들을 기다렸다. 선박을 구석구석 수색하던 경찰들이 조를 이루어 갑판으로 몰려들었다.
“무슨 결과가 없었나?”
“없었습니다.”
“화물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원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조타실도 수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경찰들은 이구동성으로 똑같은 대답을 했다. 조 경정은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봐도 중궁상선에서 하역작업이나 물품은 물론 사람도 육지로 내려오지 않았다. 단지 들것에 실린 환자만 구급차로 운송 된 것이다. 조 경정이 급하게 임 경위를 불렀다.
“검문소를 나간 구급차 차량번호를 조회하고 추적 하도록 해.”
“네.”
경찰들이 줄을 지어 철사다리를 이용해 육지로 내려왔다. 경찰들을 태운 경찰차와 경찰 버스에 전조등과 미등이 어둠 속을 밝혔다. 비상사이렌을 울리는 경찰차와 경찰 버스가 구급차가 사라진 도심지를 향해 질주해 갔다. 군산 외항이 잇는 부둣가에는 어둠과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부두의 검문소를 빠져나온 구급차는 사이렌을 울리고 사내를 질주했다. 사내를 벗어난 구급차는 사이렌을 멈추고 어둠 속을 달렸다. 구급차는 옥산면을 지나 청암산 중턱을 오르고 있었다. 구급차는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철문이 열려진 용두목장 안으로 들어가 멈추었다.
구급차의 전조등이 꺼지고 건물 안에서 나온 사람은 곽춘호였다. 흰 가운을 걸친 남자들은 재빠르게 구급차의 뒷문을 열고 환자를 들것에 실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곽춘호가 거실안의 한쪽 벽면에 세워진 진열장을 밀어내니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남자들은 들것을 들고 지하실로 운반하였다. 곽춘호가 한 남자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수고했어. 자네는 구급차를 세차해서 증거 될 만할 것을 없애고 전주에 버리도록 해.”
“네. 큰 형님.”
남자는 구십도 각도로 인사를 하고 건물을 나갔다. 잠시 후 시동 거는 소리에 이어서 구급차의 엔진소리가 멀어져 갔다. 지하실에 여러 개의 전등이 밝혀졌다. 지하실 가운데의 침상위에는 환자가 주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곽춘호와 남자들은 침상 부위로 몰려들었다. 한 남자가 환자가 감고 있는 붕대를 풀었다.
붕대가 풀려지고 나타난 모습은 환자가 아니라 시체였다. 온몸이 시퍼렇게 변한 살갗이었고 목 밑에서부터 하복부까지 절개된 부위는 가마니를 꿰매듯이 엉성하게 봉합되어 있었다. 피로 물들인 시체는 감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 광경을 지하실 문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선잠이 들었다가 어수선한 소리에 깨어난 이진아였다. 거실로 나오니 진열장이 옮겨져 있는 벽에 어두운 공간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기에 층계를 내려 왔던 것이다.
문틈으로 들어난 지하실 광경에 이진아는 치를 떨었다. 환한 불빛아래 들어난 침상위에는 물에 퉁퉁 불은 듯이 부풀어 오른 시신이었다. 더욱 놀란 것은 남자들이 짐승의 껍질을 벗겨내듯이 시신의 봉합된 상처 속에 손을 넣고 피부를 뜯어냈다. 가죽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시체의 내부가 들어났다.
시체에는 내장이 없었고 비닐봉지들이 꽉 들어 차있었다. 곽춘호가 봉지 하나를 뜯어내니 하얀 분말가루가 나타났다. 분말가루는 그들이 밀수입한 필로폰이었다. 분말가루를 찍어 혀끝에 대고 입맛을 다신 곽춘호의 얼굴에 희소가 흘렀다.
“이건 순도 백 프로야. 수고들 했어.”
“저희들은 큰 형님 지시만 따랐을 뿐. 축하 합니다.”
“아직 일러. 이걸 실수 없이 넘겨야 안심하지.”
“정 힘들면 짱 밟히기 전에 일본으로 보내죠?”
“그건 내가 알아서 해. 짱깨들이 물건 값 먼저 달라고 하는 게 문제야.”
“나중에 줘도 되잖아요.”
남자들이 시신에서 분말가루가 담긴 비닐봉지들을 꺼내 트렁크에 담기 시작했다. 비닐봉지가 꺼내질 때마다 시신의 내부는 피가 엉겨 붙은 동굴처럼 비어갔다. 곽춘호가 들고 있던 봉지를 묶어서 트렁크에 던져 넣었다.
“아니, 큰 거라서 급하다고 하니 신용은 지켜야지. 그건 그렇고 너희들은 내일부터 K지시대로 권진경이라는 여자를 찾아야 돼.”
“남산에서 김 씨 찾기 아닙니까? 그건 힘들 것 같은데요.”
“그래도 우리 뒤를 봐주는데 노력해 봐야 돼. GIS 정보에 의하면 그 여자가 개명했을 수도 있다니까. 애들 풀어서 찾아봐. 경찰에서도 찾고 있으니까.”
그들의 말을 엿듣고 있던 이진아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K는 누구고, GIS는 누구이기에 곽춘호의 뒤를 봐준다는 말인가. 그들은 누구이기에 경찰력까지 동원할 수 있고, 무엇 때문에 권진경이라는 여자를 찾고 있는지. 곽춘호는 왜 그들의 지시에 복종하는지 이진아의 의혹이 증폭되었다. 공포를 느끼는 지하실의 광경에 이진아는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이 오싹하였다. 문득 층계 위로 통하는 거실 쪽에서 인기척이 들라는 것 같았다.
하얗게 질린 이진아는 재빠르게 층계를 올라가 거실로 들어섰다. 세면장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얼른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면장에서 나온 것은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잠옷 차림의 김애경이었다. 농염한 몸매의 그녀가 양손을 허리에 집고서서 눈살을 찌푸렸다.
“너, 왜 안자고 나와 있는 거야? 누구한테 꼬리치려고.”
“목말라서 물 마시려고요.”
이진아는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김애경은 곽춘호가 이진아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진아에게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며 구박을 하였다. 김애경의 시선을 의식한 이진아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엉겁결에 잠자다가 나와서 팬티 차림이었다. 다행히 허벅지까지 가리는 남자의 커다란 와이셔츠를 걸친 것이 다행이었다.
겸연쩍은 모습으로 돌아선 이진아는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거주하는 방은 주방 안으로 통하는 곳에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이진아는 지하실의 광경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로서 감당할 수 없는 음모가 곽춘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전남 도경의 수사과 안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서울시경에서 나온 조병문 경정은 밤새도록 중국 상선에서 환자를 실고 나온 구급차를 추적하느라고 피곤했다. 수사과 안에는 조 경정과 같이 서울에서 내려온 서울시경 형사들과 현지 형사들이 뒤엉켜 전화와 무전기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의자에 몸을 묻은 조 경정은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임 경위가 그에게 다가와 어깨를 흔들었다.
“계장님! 전주에서 구급차를 발견했다는데요.”
“그래!? 그럼 가봐야지.”
눈을 감고 있던 조 경정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임 경위가 입맛을 다셨다.
“가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
“도경 형사들이 수색해 봤는데, 사람의 흔적이나 물건들은 없고 깨끗하게 세차되어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럼, 구급차가 다닌 경로나 목격자가 있는지 탐문해봐.”
“네!”
돌아선 임 경위가 들고 있던 수첩을 손바닥으로 치며 수사과 출입구로 다가갔다. 그가 출입문 앞으로 다가서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을 열려고 손을 뻗었던 임 경위는 입을 쩍 벌렸다. 의외로 문을 열고 들어 선 사람은 강민우였다. 강민우는 조병문이 마약밀수사건 때문에 군산으로 출장을 간다는 말을 듣고 곽춘호가 떠올라 겸사겸사해서 내려온 것이다.
“아! 여기는 웬일로!?”
“임 경위도 와 있었네요.”
“네! 증거도 못 잡고 잠도 못 자고 말이 아닙니다. 저는 가볼 곳이 있어서.”
“수고하시오.”
임 경위가 꾸벅하고 수사과를 나갔다. 강민우는 두리번거리다가 창가에 의자에 몸을 묻고 있는 조병문 경정을 발견했다, 조 경정은 책상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강민우는 조경정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노이로제가 걸렸는지 조경정이 벌떡 일어나 눈을 부라렸다. 빙긋이 웃는 얼굴로 서있는 강민우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목쉰 목소리를 흘렸다.
“여기는 어쩐 일이야?”
“고생하는 조 경정, 위로하러왔지. 어때?”
“말도 마! 놈들은 놓치고, 힘들어 죽겠어.”
“어떻게 경찰의 베테랑 수사관이 실수를 하나?”
“너무, 놈들을 쉽게 봤어. 놈들의 트릭이었어. 놈들이 구급차를 이용해 물건을 빼돌린 것 같아. 전주에서 구급차를 발견했다는군. 미치겠네.”
조 경정은 눈을 감은 채 넋두리 하듯이 말했다. 엉덩이 끝을 책상에 걸친 강민우는 유리창 밖을 내다보며 추리를 했다. 어쩌면 조 경정이 쫓는 마약 밀수 용의자들이 곽춘호와 관계가 있을 것도 같았다.
“구급차 흔적을 추적하는 중이겠군.”
“응. 잘못하면 장기 수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아침 식사는 했어?”
“임 경위와 해장국 한 그릇 뚝딱했는데 입안이 껄끄러워서.......”
“군산에서 유명한 꽃게 장으로 입맛을 돋워야지. 점심 식사는 병문이가 진급 턱으로 사.”
“알았어. 내가 사지.”
“그럼, 이따가 봐.”
책상에 걸터앉았던 강민우가 일어섰다. 그때까지도 의자에 등을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던 조 경정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졸음이 오는 눈동자를 껌벅거렸다.
“어디가려고?”
“잠간 다녀 올 곳이 있어.”
강민우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수사과 사무실을 나갔다. 강민우는 불곰 최중혁에게 가볼 생각이었다. 흐릿한 눈빛으로 강민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 경정은 다시 의자에 몸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수사과 내에는 전화벨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리기도 하고 형사들은 전화와 무전기를 들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하며 혹은 심각한 표정들을 짓기도 한다.
청암산 중턱의 용두목장.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던 이진아는 뒤늦게 잠이 들었어도 동이 틀 무렵 깨어났었다. 거실로 나가니 뻥 뚫렸던 벽은 다시 진열장으로 가로 막혀 있었고 집안은 조용했다. 거실 뒤의 창문으로 내다보니 곽춘호와 김애경이 사슴우리에서 사슴들을 돌보고 있었다. 이진아는 김애경의 잔소리를 듣기 전에 아침식사 준비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식사준비가 다 되었을 무렵 곽춘호와 김애경, 그리고 목을 길게 늘어트린 주승균이 헐레벌떡 뒤쫓아 들어왔다. 감애경은 뒤쫓아 들어오는 주승균이 못마땅한지 찌푸린 인상이었다. 앞서서 들어온 곽춘호가 주승균을 핀잔하듯이 말했다.
“넌 할 일도 없니? 아침부터 찾아오게.”
“하하~! 형님 연락받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밥그릇 농사라도 져야지요.”
헤픈 웃음을 흘린 주승균이 넉살을 떨었다. 곽춘호는 필로폰을 가져가라는 연락을 했으나 이렇게 일찍 주승균이 찾아 올 줄은 몰랐다. 그러니 김애경의 심사는 더욱 뒤틀리고 있었다. 그녀는 발끈해서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주방을 향해 소리 질렀다.
“얘! 애리야! 식사준비 안하고 뭐하니?”
“다 해 놨어요.”
타월에 손을 닦으며 이진아가 주방에서 쪼르르 나왔다. 곽춘호가 세면장 문을 열고 들어가고 주승균은 거실에서 눈치를 살핀다. 김애경은 공연히 빗자루를 들고 거실 바닥을 먼지가 나도록 획획 쓸어 부쳤다. 곽춘호가 세면장에서 나와 주방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주승균과 김애경이 주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들이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하고 이진아는 그들 앞에 놓인 컵에 일일이 물을 따라 주었다.
주승균이 식사를 하면서 이진아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옆으로 다가와 물을 따라 주는 이진아의 스커트 속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쳤다. 엉덩이를 더듬는 촉감에 이진아가 흠칫 놀랬다. 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쳐다보는 곽춘호와 마주쳤다. 이진아는 곽춘호를 시험하고 싶어서 주승균을 힐끗 쳐다보며 눈짓을 하였다. 곽춘호의 시선이 이진아의 엉덩이를 더듬는 주승균의 손을 향했다. 곽춘호는 주승균을 쏘아보며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으 흠~! 물건 가지러 왔지?”
“네........!?”
한손으로 반찬을 집어 들었던 주승균이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 곽춘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곽춘호의 사나운 눈빛을 의식한 주승균이 이진아의 엉덩이를 쓰다듬던 손을 얼핏 빼냈다. 묘한 분위기를 느낀 김애경이 의혹스러운 눈빛으로 곽춘호와 주승균을 번갈아 쳐다봤다. 주스균이 무안함을 대신하여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 하여튼 형님 죄송스럽고 고맙습니다.”
“아우님은 매번 도와 달라고만 해요.”
영문도 모르고 김애경이 불만스러웠던 마음을 뱉어냈다. 이진아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곽춘호를 향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그들은 식사하느라고 침묵이 흘렀다. 입속에든 음식을 씹어 먹으며 곽춘호가 정색을 하고 주승균을 향해 툭 내뱉었다.
“50그램이면 충분하지?”
“아! 네.”
“짱개들이 자금을 달라는데, 너 현금 좀 마련할 때가 없니?”
“형님도 참! 제가 쇳가루 마련할 수 있으면 형님한테 손 벌리겠어요.”
수저를 들고 입안에 든 음식물을 씹던 곽춘호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한다. 그리고 김애경을 향해 말한다.
“할 수 없군. 당신, 승균이 갈 때 같이 가서 은행에 좀 다녀와.”
“왜요........!?”
김애경이 수저를 놓으면서 곽춘호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하기 싫은 일을 시킨다는 표정이다. 곽춘호가 묵묵히 남은 밥을 수저에 떠서 입에 넣었다. 김애경에게 반문을 하지 말라는 모습이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김애경만 답답할 뿐이다. 여유를 두고 곽춘호가 말했다.
“통장 줄 테니까, 환전해서 마카오 은행구좌로 입금시키고 와.”
“.........네!”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김애경은 마지못해 대답을 한다. 곽춘호의 말은 거부할 수 없는 곧 명령이었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거실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들은 습관처럼 이진아가 가져다주는 커피를 마셨다. 빨리 물건을 받아 가고 싶은 주승균은 단숨에 커피 잔을 비우고 느긋한 곽춘호의 눈치를 살폈다.
“물건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건 몰라도 돼. 기다려.”
곽춘호는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커피 잔을 비웠다. 주방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진아가 커피 잔을 치우러 거실로 나왔다. 슬그머니 일어선 곽춘호를 뒤따라 김애경도 일어섰다. 김애경은 침실로 들어가고 곽춘호가 진열장 상단에 있는 도자기를 옆으로 옮겨 놓았다. 그 자리에 보이는 스위치를 누르니 진열장이 스르르 이동하고 지하실로 통하는 어둠침침한 계단이 나왔다.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간 곽춘호가 잠시 후 검은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나왔다. 들고 나온 비닐봉지를 주승균 앞 탁자에 집어 던지듯이 올려놓았다.
“괜히 학교가지 말고 잘 가져다 써.”
“넵! 감사합니다. 짱 밟혀도 형님한테 피해 안 입힙니다.”
주승균은 굽실거리며 일어서서 비닐봉지를 들고 나갔다. 침실 문이 열리고 김애경이 투피스로 갈아입고 나왔다. 김애경은 뭐가 미덥지 못한지 곽춘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고 이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볼멘소리로 일침을 놓았다.
“애리야! 너, 내가 나갔다 올 동안 빨래 다 해놔.”
“네!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이진아가 힐끗 돌아보고는 거품난 수세미로 그릇을 문지른다. 머뭇거리던 김애경이 거실로 나가니 곽춘호가 통장, 도장과 입금시킬 구좌번호를 메모한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김애경이 현관문을 나서고 곽춘호도 뒤따라 나갔다. 승용차 시동 거는 소리에 이어서 둔탁한 엔진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곽춘호가 거실로 들어왔다. 이진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들의 일거일동을 감지하고 있었다.
거실로 들어온 곽춘호가 주방 안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이진아의 등 뒤로 다가섰다. 이진아는 목덜미에 불어오는 곽춘호의 입김을 의식하고 긴장이 되었다. 김애경도 없고 곽춘호의 태도로 보아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등 뒤에 다가선 곽춘호가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우격다짐으로 블라우스 밀고 올라온 곽춘호의 손이 브래지어를 들추고 들어왔다. 젖가슴이 잡히는 순간 이진아가 몸을 비틀었다.
“아저씨 이러지 마세요. 아줌마가 알면 혼나요.”
“괜찮아. 애리 요구 다 들어줄게.”
“시. 싫어요. 이러시면, 이집에서 나갈 거예요.”
“나가기는.......! 네 요구 다 들어 준다니까.”
곽춘호의 손가락이 젖꼭지를 끼고 주물렀다. 이진아는 작은 통증과 함께 아릿한 감각을 느꼈다. 스커트위의 엉덩이에는 벌써 후끈 달아올라 발기한 남성이 마찰을 하고 있었다. 그때 거실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벨 소리도 무시하고 곽춘호의 손길이 이진아의 몸을 거칠게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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