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립스틱*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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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정치보도와 기자회견을 하는 장소는 NXX의 방송국이었다. TV 화면이 흔들리고 기자들이 모인 강당의 광경이 화면에 나왔다. 카메라를 조정하는 기자, 완장을 두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자. 속기록을 들고 준비하는 기자들의 모습이 비추었다가 연단 석에 고정되었다.
강당 입구의 둘러싸인 기자들을 헤치고 나타난 사람은 강민우였다. 강민우를 뒤따라 들어온 사람은 안기부 직원과 전희재 실장, 그리고 송나희였다. 연단에 올라선 강민우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번쩍거리고 강민우가 마이크 가까이 다가섰다.
“저는 안기부의 특수 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강민우입니다. 지금부터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정권 야욕에 눈먼 음모에 희생당했던 어린 소녀가 죽음으로서 보여준 고통을 알리고자 합니다. 이렇게 알림으로서 다시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금 야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있는 권익수 안기부장은 불륜관계를 맺은 여인에게서 낳은 사생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야망으로 자신을 지원하는 정치세력과 함께 자신의 딸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며 왔습니다.”
취재를 하던 기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짬을 내어 물을 마신 강민우는 이어서 말했다.
“광주사태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 최태웅과 남경식은 광주사태가 북한이 저지른 것처럼 폭력조직을 이용해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권익수의 사생아를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시를 받은 폭력조직은 권익수의 사생아인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윤간하였습니다. 윤간당하는 딸을 구해낸 것이 바로 저입니다. 그 권익수의 딸은 저주스러운 고통을 잊지 못하고 자신을 윤간한 폭력배들을 하나씩 살해해 갔습니다. 잘못된 인간 세상이 한 여자를 괴물로 만든 것입니다. 권익수의 딸이 바로 천궁교 사건과 같이 사망한 연쇄살인범 이진아, 본명은 곽진경입니다.”
카메라 푸래쉬가 번쩍거리고 보도 발표장이 떠들썩하게 웅성거렸다. 한 기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권익수씨를 음모하는 상대 야당의 음모공작 아닙니까?”
“제가 연쇄살인범 이진아를 데리고 있던 장본인입니다.”
“살인범이 죽은 마당에 증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증거보다는 여러분들이 확신 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강민우가 전희재 실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희재 실장이 연단 옆의 출입문을 열었다. 또 다른 안기부 직원의 호위를 받고 들어서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진아의 어머니 이미연이었다. 이미연이 강민우 옆으로 다가섰다. 강민우가 이미연에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미연입니다.”
“권익수 씨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이죠?”
“.......권익수는 악마입니다. 술자리에서 부하들을 시켜 저를 납치하고 강간했습니다.”
취재하던 강당의 기자들이 다시 술렁거렸다. 기자들을 바라보던 강민우가 손을 들어 술렁이는 기자들을 진정 시켰다. 그리고 이어서 이미연에게 물었다.
“본명 곽진경, 이진아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권익수에게 강간당하고 낳은 제 딸입니다.”
“그런데 왜 딸을 보호하지 못했지요?”
“권익수의 부하들이 저와 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딸을 광주성당의 고아원에 맡기고 미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저를 제거하려고 뒤쫓고 있습니다.”
그때 볼펜과 보도 자료들이 연단으로 날아왔다. 기자들 중에 누군가 야유를 퍼부었다.
“이건 음모야. 새빨간 거짓말이다.”
“어떤 놈이 음모래. 여당 앞잡이 아냐?”
“저 놈은 빨갱이야”
“민주주의를 빨갱이로 만드는 놈이 누구야?”
기자들끼리 욕설이 오가고 강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권익수를 지원하는 언론의 기자들의 야유가 발단되어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더 이상 발표 할 것도 없고 발표할 필요를 못 느낀 강민우는 이미연을 감싸고 연단을 내려섰다. 아니 충분히 해야 할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 강민우는 이미연과 함께 안기부 직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강당을 빠져 나갔다.
강민우의 보도 자료는 NXX 방송국뿐만 아니라, 다른 방송국과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되었다. 차기 대권의 주자에 대한 신상문제라서 이삼십 분 간격으로 뉴스로도 방영되었다. 안기부 남산 청사 집무실에 있던 권익수도 방송을 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닦아온 정치생명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분노가 치민 권익수는 벌떡 일어나서 책상위에 있는 물건들을 바닥에 팽개쳤다. 그에게는 죽음보다도 더 한 고통이 엄습했다.
책상 주위를 맴돌며 서성거리는 권익수는 어떻게 해야 곤경에서 벗어날지 혼란스러웠다. 모든 야망이 물거품이 되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심정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과 통하는 직통전화였다. 그는 두려움에 한번, 두 번, 벨소리가 울려도 전화를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드는 그의 목소리는 착 갈아 앉아 있었다.
“네. 안기부장 권익수입니다.”
“당신,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지금은 시대가 변했어. 당신이 우리 당을 말아 먹을 작정이야?”
“당에 피해 가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조치는 무슨 조치!? 옷 벗고 대기하고 있어.”
와락 역정을 내는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권익수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잘못 놓여 진 수화기가 전화선에 매달려 흔들거렸다. 꿈과 야망을 오직 청와대 입성만을 갖고 매진해 온 그였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정치생명이 끝난 폐인이 되거나 아니면 그가 다른 정치인들을 다루듯이 반대로 유치장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선택하기 싫은 막막한 어둠이었다.
권익수는 책상 뒤에 있는 진열장에서 위스키 병을 꺼냈다. 그리고 병마개를 따서 병째 위스키를 들이켰다. 짜르르한 쾌감과 인생에 패배한 자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책상 설함을 열고 권총을 꺼내 들었다. 소파에 앉은 그의 머릿속에 지나간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흘러갔다. 아무리 치밀하게 살아왔어도 생각하지 않았던 운명의 함정, 발버둥 치면 칠수록, 화를 내면 낼수록, 그 함정은 보이지 않는 어둠이다. 어쩌면 스스로 파놓은 운명의 덫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선택의 시간! 권총의 안전핀을 뽑고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곽진우는 피식하고 쓴웃음을 흘렸다. 총구를 관자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 별안간 총성이 울려 메아리쳤다. 안기부 내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긴장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보안 요원들이 총소리가 들린 본관 건물로 달음박질하였다. 안기부 최고 책임자가 있는 건물 6층으로 모여드는 요원들 속에는 차문기 국장의 모습도 보였다. 총성이 들린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들은 숨을 들이키며 멈추어 섰다. 두개골이 파손되어 피를 흘리며 소파에 앉아 고개를 떨어트리고 사람. 한 시대를 그림자처럼 주름 잡던 지도자의 최후의 모습이었다.
다음날 방송과 신문은 차기대권주자였던 정치지도자의 자살을 대서특필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권력의 야욕을 망각 속에 묻어 버렸던가? 야심이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활활 타오르지만 죽은 후에는 한줌의 재가 되고 만다. 매스컴을 통해 정치지도자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가 자살한 원인에 대해 설왕설래하였다. 그를 대신하여 또 다른 야욕을 꿈꾸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랑에는 슬픔이 있고, 행운에는 기쁨이 있고, 용맹에는 명예가 있으며, 야망에는 죽음이 있다. 슬픔은 인간의 불행한 특권이다. 아름다운 장미는 가시 속에서 핀다. 슬픔의 배후에는 기쁨이 있다. 어두웠던 역사 속에는 반드시 슬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쁨은 삶의 요소이고, 욕구이고. 힘이고 삶의 가치이다. 사람은 누구나 기쁨에의 욕구를 가지고 희망을 가질 권리가 있다.
정치권은 혼탁해졌으나 태풍 ‘셀마’를 시발로 ‘다이너’에 이르기까지 태풍과 집중호우가 전국을 강타하듯이 대통령 직선제가 개헌되었다. 모든 사람의 편의를 충족시킬 수 있는 법은 없다. 그것이 전반적으로 다수에게 이익이 된다면 만족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정치적 집단은 사람의 신체와 같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멸하기 시작하며, 그 자체 속에서 자멸의 요인을 가지고 있다. GIS 정치 모임대신 JRS 정치모임이 부각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시간은 모든 권세를 침식시키고 정복한다. 시간은 소중히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포착하는 자의 벗이며, 때가 아닌데 너무 서두르는 자에겐 최대의 적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시간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잠실벌을 수놓은 화려한 축제는 단번에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았다. 세계 159개국, 8천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다. 냉전의 첨예한 대립 속에 80년 모스크바와 84년 LA에서 연속 반쪽짜리 대회로 위기를 맞았던 올림픽은 분단된 한반도에서 오히려 극적인 부활을 알리는 계기이다.
시간이 흘러가듯이 바다바람이 파도 위를 흘러간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다. 아니 행복을 낚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의 한적한 바닷가의 암벽위에서 강민우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옆구리에 찬 호출기에서 호출음이 울렸다. 안기부에서 오는 호출음이었다.
강민우는 호출기를 빼서 출렁이는 파도를 향해 멀리 던졌다. 수평선위로 떠오르는 이진아의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했던 ‘사랑한다고, 행복했다고, 인생은 연극이라는 말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모른 채 태어났다.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지 모른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왜 죽는지 어떻게 죽어야 의미 있게 죽는지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간다. 찌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던 강민우가 얼핏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낚싯대 줄 끝에는 작은 돌돔 한 마리가 낚이어 파닥거렸다.
“오늘은 씨알이 작은데........”
혼잣말을 흘린 강민우는 잡힌 돌돔을 다시 바닷물에 던지고 낚싯밥을 끼운다. 강민우의 등 뒤에 설치된 텐트 옆에서는 송나희가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 여자아기가 텐트 안에서 송나희를 향해 뒤뚱뒤뚱 걸어오다가 넘어졌다. 쪼그려 앉아서 버너위에 코펠을 올려놓던 송나희가 급하게 일어선다.
“여보~! 은지 좀 봐주세요!”
“응, 알았어.”
강민우는 서둘러 낚싯대를 바다에 던져놓고 일어선다. 넘어져 있는 은지를 일으켜서 안고 방긋이 웃는 은지의 뺨에 입맞춤을 한다. 송나희가 힘겨운 듯 허리를 짚고 일어섰다. 강민우와 밝은 미소를 짓는 송나희의 시선이 마주친다. 강민우는 배가 불러오는 송나희가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은지의 동생을 임신하고 있었다. 버너위에 끓어오르는 매운탕이 코펠 뚜껑을 들썩이며 넘쳐흐른다.
송나희가 얼른 코펠 뚜껑을 열고 수저로 국물을 떠먹어 본다. 행복의 맛을 느끼듯이 그녀의 눈가에는 자잘한 미소가 흐른다. 고통과 슬픔을 알기 전까지는 인생의 충분한 맛을 봤다고 할 수 없다. 만나서 정이 들고, 헤어지는 아픔을 느끼기도 하고, 사랑해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행복해질 수 있는 인생은 한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대충 책장을 넘기지만, 현명한 사람은 공들여서 읽는다. 그들은 단 한 번밖에 읽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ND]
*글을 마치면서-
아름다운 시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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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입구의 둘러싸인 기자들을 헤치고 나타난 사람은 강민우였다. 강민우를 뒤따라 들어온 사람은 안기부 직원과 전희재 실장, 그리고 송나희였다. 연단에 올라선 강민우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번쩍거리고 강민우가 마이크 가까이 다가섰다.
“저는 안기부의 특수 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강민우입니다. 지금부터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정권 야욕에 눈먼 음모에 희생당했던 어린 소녀가 죽음으로서 보여준 고통을 알리고자 합니다. 이렇게 알림으로서 다시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지금 야당의 차기 대권주자로 있는 권익수 안기부장은 불륜관계를 맺은 여인에게서 낳은 사생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치적인 야망으로 자신을 지원하는 정치세력과 함께 자신의 딸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며 왔습니다.”
취재를 하던 기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짬을 내어 물을 마신 강민우는 이어서 말했다.
“광주사태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 최태웅과 남경식은 광주사태가 북한이 저지른 것처럼 폭력조직을 이용해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권익수의 사생아를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시를 받은 폭력조직은 권익수의 사생아인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윤간하였습니다. 윤간당하는 딸을 구해낸 것이 바로 저입니다. 그 권익수의 딸은 저주스러운 고통을 잊지 못하고 자신을 윤간한 폭력배들을 하나씩 살해해 갔습니다. 잘못된 인간 세상이 한 여자를 괴물로 만든 것입니다. 권익수의 딸이 바로 천궁교 사건과 같이 사망한 연쇄살인범 이진아, 본명은 곽진경입니다.”
카메라 푸래쉬가 번쩍거리고 보도 발표장이 떠들썩하게 웅성거렸다. 한 기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권익수씨를 음모하는 상대 야당의 음모공작 아닙니까?”
“제가 연쇄살인범 이진아를 데리고 있던 장본인입니다.”
“살인범이 죽은 마당에 증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증거보다는 여러분들이 확신 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강민우가 전희재 실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희재 실장이 연단 옆의 출입문을 열었다. 또 다른 안기부 직원의 호위를 받고 들어서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귀국한 이진아의 어머니 이미연이었다. 이미연이 강민우 옆으로 다가섰다. 강민우가 이미연에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이미연입니다.”
“권익수 씨와는 어떻게 되는 사이이죠?”
“.......권익수는 악마입니다. 술자리에서 부하들을 시켜 저를 납치하고 강간했습니다.”
취재하던 강당의 기자들이 다시 술렁거렸다. 기자들을 바라보던 강민우가 손을 들어 술렁이는 기자들을 진정 시켰다. 그리고 이어서 이미연에게 물었다.
“본명 곽진경, 이진아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권익수에게 강간당하고 낳은 제 딸입니다.”
“그런데 왜 딸을 보호하지 못했지요?”
“권익수의 부하들이 저와 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딸을 광주성당의 고아원에 맡기고 미국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그들이 저를 제거하려고 뒤쫓고 있습니다.”
그때 볼펜과 보도 자료들이 연단으로 날아왔다. 기자들 중에 누군가 야유를 퍼부었다.
“이건 음모야. 새빨간 거짓말이다.”
“어떤 놈이 음모래. 여당 앞잡이 아냐?”
“저 놈은 빨갱이야”
“민주주의를 빨갱이로 만드는 놈이 누구야?”
기자들끼리 욕설이 오가고 강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권익수를 지원하는 언론의 기자들의 야유가 발단되어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더 이상 발표 할 것도 없고 발표할 필요를 못 느낀 강민우는 이미연을 감싸고 연단을 내려섰다. 아니 충분히 해야 할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 강민우는 이미연과 함께 안기부 직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강당을 빠져 나갔다.
강민우의 보도 자료는 NXX 방송국뿐만 아니라, 다른 방송국과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되었다. 차기 대권의 주자에 대한 신상문제라서 이삼십 분 간격으로 뉴스로도 방영되었다. 안기부 남산 청사 집무실에 있던 권익수도 방송을 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닦아온 정치생명이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분노가 치민 권익수는 벌떡 일어나서 책상위에 있는 물건들을 바닥에 팽개쳤다. 그에게는 죽음보다도 더 한 고통이 엄습했다.
책상 주위를 맴돌며 서성거리는 권익수는 어떻게 해야 곤경에서 벗어날지 혼란스러웠다. 모든 야망이 물거품이 되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심정이다. 전화벨이 울렸다.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과 통하는 직통전화였다. 그는 두려움에 한번, 두 번, 벨소리가 울려도 전화를 받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드는 그의 목소리는 착 갈아 앉아 있었다.
“네. 안기부장 권익수입니다.”
“당신,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지금은 시대가 변했어. 당신이 우리 당을 말아 먹을 작정이야?”
“당에 피해 가지 않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조치는 무슨 조치!? 옷 벗고 대기하고 있어.”
와락 역정을 내는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권익수는 전화기를 내려놓으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잘못 놓여 진 수화기가 전화선에 매달려 흔들거렸다. 꿈과 야망을 오직 청와대 입성만을 갖고 매진해 온 그였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정치생명이 끝난 폐인이 되거나 아니면 그가 다른 정치인들을 다루듯이 반대로 유치장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선택하기 싫은 막막한 어둠이었다.
권익수는 책상 뒤에 있는 진열장에서 위스키 병을 꺼냈다. 그리고 병마개를 따서 병째 위스키를 들이켰다. 짜르르한 쾌감과 인생에 패배한 자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책상 설함을 열고 권총을 꺼내 들었다. 소파에 앉은 그의 머릿속에 지나간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흘러갔다. 아무리 치밀하게 살아왔어도 생각하지 않았던 운명의 함정, 발버둥 치면 칠수록, 화를 내면 낼수록, 그 함정은 보이지 않는 어둠이다. 어쩌면 스스로 파놓은 운명의 덫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선택의 시간! 권총의 안전핀을 뽑고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곽진우는 피식하고 쓴웃음을 흘렸다. 총구를 관자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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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 별안간 총성이 울려 메아리쳤다. 안기부 내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긴장하여 서로를 바라보았다. 보안 요원들이 총소리가 들린 본관 건물로 달음박질하였다. 안기부 최고 책임자가 있는 건물 6층으로 모여드는 요원들 속에는 차문기 국장의 모습도 보였다. 총성이 들린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들은 숨을 들이키며 멈추어 섰다. 두개골이 파손되어 피를 흘리며 소파에 앉아 고개를 떨어트리고 사람. 한 시대를 그림자처럼 주름 잡던 지도자의 최후의 모습이었다.
다음날 방송과 신문은 차기대권주자였던 정치지도자의 자살을 대서특필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권력의 야욕을 망각 속에 묻어 버렸던가? 야심이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활활 타오르지만 죽은 후에는 한줌의 재가 되고 만다. 매스컴을 통해 정치지도자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가 자살한 원인에 대해 설왕설래하였다. 그를 대신하여 또 다른 야욕을 꿈꾸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랑에는 슬픔이 있고, 행운에는 기쁨이 있고, 용맹에는 명예가 있으며, 야망에는 죽음이 있다. 슬픔은 인간의 불행한 특권이다. 아름다운 장미는 가시 속에서 핀다. 슬픔의 배후에는 기쁨이 있다. 어두웠던 역사 속에는 반드시 슬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쁨은 삶의 요소이고, 욕구이고. 힘이고 삶의 가치이다. 사람은 누구나 기쁨에의 욕구를 가지고 희망을 가질 권리가 있다.
정치권은 혼탁해졌으나 태풍 ‘셀마’를 시발로 ‘다이너’에 이르기까지 태풍과 집중호우가 전국을 강타하듯이 대통령 직선제가 개헌되었다. 모든 사람의 편의를 충족시킬 수 있는 법은 없다. 그것이 전반적으로 다수에게 이익이 된다면 만족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정치적 집단은 사람의 신체와 같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멸하기 시작하며, 그 자체 속에서 자멸의 요인을 가지고 있다. GIS 정치 모임대신 JRS 정치모임이 부각되고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시간은 모든 권세를 침식시키고 정복한다. 시간은 소중히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포착하는 자의 벗이며, 때가 아닌데 너무 서두르는 자에겐 최대의 적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시간이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잠실벌을 수놓은 화려한 축제는 단번에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았다. 세계 159개국, 8천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다. 냉전의 첨예한 대립 속에 80년 모스크바와 84년 LA에서 연속 반쪽짜리 대회로 위기를 맞았던 올림픽은 분단된 한반도에서 오히려 극적인 부활을 알리는 계기이다.
시간이 흘러가듯이 바다바람이 파도 위를 흘러간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다. 아니 행복을 낚아 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의 한적한 바닷가의 암벽위에서 강민우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옆구리에 찬 호출기에서 호출음이 울렸다. 안기부에서 오는 호출음이었다.
강민우는 호출기를 빼서 출렁이는 파도를 향해 멀리 던졌다. 수평선위로 떠오르는 이진아의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했던 ‘사랑한다고, 행복했다고, 인생은 연극이라는 말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모른 채 태어났다.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지 모른 채로 살아간다. 그리고 왜 죽는지 어떻게 죽어야 의미 있게 죽는지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간다. 찌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던 강민우가 얼핏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낚싯대 줄 끝에는 작은 돌돔 한 마리가 낚이어 파닥거렸다.
“오늘은 씨알이 작은데........”
혼잣말을 흘린 강민우는 잡힌 돌돔을 다시 바닷물에 던지고 낚싯밥을 끼운다. 강민우의 등 뒤에 설치된 텐트 옆에서는 송나희가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 여자아기가 텐트 안에서 송나희를 향해 뒤뚱뒤뚱 걸어오다가 넘어졌다. 쪼그려 앉아서 버너위에 코펠을 올려놓던 송나희가 급하게 일어선다.
“여보~! 은지 좀 봐주세요!”
“응, 알았어.”
강민우는 서둘러 낚싯대를 바다에 던져놓고 일어선다. 넘어져 있는 은지를 일으켜서 안고 방긋이 웃는 은지의 뺨에 입맞춤을 한다. 송나희가 힘겨운 듯 허리를 짚고 일어섰다. 강민우와 밝은 미소를 짓는 송나희의 시선이 마주친다. 강민우는 배가 불러오는 송나희가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은지의 동생을 임신하고 있었다. 버너위에 끓어오르는 매운탕이 코펠 뚜껑을 들썩이며 넘쳐흐른다.
송나희가 얼른 코펠 뚜껑을 열고 수저로 국물을 떠먹어 본다. 행복의 맛을 느끼듯이 그녀의 눈가에는 자잘한 미소가 흐른다. 고통과 슬픔을 알기 전까지는 인생의 충분한 맛을 봤다고 할 수 없다. 만나서 정이 들고, 헤어지는 아픔을 느끼기도 하고, 사랑해서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행복해질 수 있는 인생은 한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대충 책장을 넘기지만, 현명한 사람은 공들여서 읽는다. 그들은 단 한 번밖에 읽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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